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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금도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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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eneon Oct 04. 2015

치유를 위한 독서

[황정은, 百의 그림자]

눈 앞이 깜깜해지는 것보다 더

세상이 깜깜하게 보이는

병에 걸렸다.



한동안 나는 병에 걸려 있었다. 소설을 읽지 못하는 병. 그 어떤 책을 펼쳐도 흥미도 안 생기고, 꾸역꾸역 읽어도 까만 게 글자인지 개미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였다. 블로그 '금도끼'칸은 이미 먼지가 켜켜이 쌓여가고 곰팡내가 나려는데, 내 머리는 도무지 소설 한 장을 소화시키지 못했다.


병이 심해지면 나는 소설뿐만이 아니라 그 어떤 책도 읽지 못할 것이란 걸 알았다. 두려운 마음에 내로라하는 이야기꾼을 찾아 좋다는 책들을 수집했다. 그러나 병은 쉽게 낫지 않았다. 내 방 한쪽 벽에는 펼쳐지지 않은 책들만 쌓여갔다. 차곡차곡도 아닌, 대충대충으로. 고전 스테디셀러부터 해서, 국내외 베스트셀러, 그리고 최근 가장 핫하다는 대중소설까지.



황정은 <백의 그림자>는 그런 가운데에서 읽어낸 책이다.  



나는 이 책을 겨우 읽었다. 재미없었기 때문은 아니다. 겨우 읽는 것은, 겨우겨우 살아가는 무재씨와 은교 씨, 그리고 여씨 아저씨와 오무사 할아버지 등 - 전자상가 사람들과의 호흡을 맞추기 위해서다. 너무 빨리 읽다가 그들의 그림자를 못 보고 그냥 지나칠까 봐. 의도한 건 아니지만 아무튼.


그림자가 어깨를 짓누르거나 사라져간다는 그들 앞에서, 나의 병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다. 나보다 안 좋은 사람을 보면서 위안 얻는 거, 정말 너무나도 싫어하지만, 그리고 이건 위안도 뭐도 아니지만, 나는 그래도 나의 그림자가 아직 잘 붙어있으니까. 앞으로도 잘 지켜야 하니까.


그렇게 겨우 읽었고, 겨우 컴퓨터를 켰다.

무려 3개월 만에. 리뷰를 쓰겠다고.




그리고 다시 또 두 달 반이 지났다.


소설을 못 읽는 나의 병은 여전히 완치되지는 않았지만 많이 쾌차했다. 흥미로운 건, 유독 황정은의 책을 잘 읽게 된다는 것. 오직 그의 책만 읽을 수 있는 병으로 바뀐 건 아닌가 생각도 들지만, 상관 없다. 황정은의 책이라면 평생  읽을 수 있다.

나는 그 어떤 암담함이나 절망감 없이 <백의 그림자>를 꺼내 들고 아무 페이지나 펴서 읽었다. 미색 종이 군데 군데서 겨우 숨쉬고 있는 무재씨, 은교씨를 확인했다. 페이지마다 포스트잇을 덕지덕지 붙여두길 잘했다고 속으로 생각하며. 나도 조용히 호흡하며.









38.

가마.

가마가  말이죠,라고 무재 씨가 말했다.

전부 다르게 생겼대요. 언젠가 책에서 봤는데 사람마다 다르게 생겼대요.

그렇대요?

그런데도 그걸 전부  가마,라고 부르니까, 편리하기는 해도, 가마의 처지로 보자면 상당히 폭력인 거죠.

가마의 처지요?

가마의 처지로 보자면요, 뭐야, 저 '가마'라는 녀석은 애초에 나와는 닮은 구석도 없는데, 하고. 그러니까 자꾸 말할수록 들켜서 이상해지는 게 아닐까요.

그런가요.




74.

말없이 밤거리를 바라보았다. 전조등을 밝힌 차들이 노랗게 빗줄기를 비추며 지나가고 있었다. 등나무 잎을 삶으면, 하고 무재 씨가 문득 말했다.

삶아서 그 물을 마시면 금이 간 부부 사이의 금슬이 다시 좋아진대요.

그렇대요?

언제고 우리 틈에 금이 가면 삶아서 마실까요?

라는 말에 당황해서 우리는 부부도 뭣도  아닌데,라고 얼버무리자 무재 씨가 우산 속에서 싱글벙글 웃었다. 나는 흠, 하고 기침을 했다.

금슬은 잘 모르겠지만 무재 씨, 이렇게 앉아 있으니 배도 따뜻하고, 좋네요.

네.

그냥 좋네요.

하며 밤을 바라보면서 앉아 있었다.




94.

오무사라고, 할아버지가 전구를 파는 가게인데요. 전구라고 해서 흔히 사용되는 알전구 같은 것이 아니고, 한 개에 이십 원, 오십 원, 백 원가량 하는, 전자 제품에 들어가는 조그만 전구거든요. 오무사에서 이런 전구를 사고 보면 반드시 한 개가 더 들어 있어요. 이십 개를 사면 이십일 개, 사십 개를 사면 사십일 개. 오십 개를 사면 오십일 개, 백 개를 사면 백한 개, 하며 매번 살 때마다 한 개가 더 들어 있는 거예요.

잘못 세는 것은 아닐까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요, 하나, 뿐이지만 반드시 하나 더, 가 반복되다 보니 우연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어느 날 물어보았어요. 할아버지가 전구를 세다 말고 나를 빤히 보시더라고요. 뭔가 잘못 물었나 보다 하면서 긴장하고 있는데 가만히 보니 입을 조금씩 움직이고 계세요. 말하려고 애를 쓰는 것처럼. 그러다 한참 만에 말씀하시길, 가지고 가는 길에 깨질 수도 있고, 불량품도 있을 수 있는데, 오무사 위치가 멀어서 손님더러 왔다 갔다 하지 말라고 한 개를 더 넣어 준다는 것이었어요. 나는 그것을 듣고 뭐랄까, 순정하게 마음이 흔들렸다고나 할까, 왜냐하면 무재 씨, 원 플러스 원이라는 것도 있잖아요. 대형 마트 같은 곳에서, 무재 씨도 그런 것을 사 본 적 있나요.

가끔은.

하나를 사면 똑같은 것을 하나 더 준다는 그것을 사고 보면 이득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그게 배려라거나 고려라는 생각은 어째 선지 들지 않고요.

그러고 보니.

오무사의 경우엔 조그맣고 값 싼 하나일 뿐이지만, 귀한 덤을 받는 듯해서 나는 좋았어요.

그렇군요.




104.

할아버지가 죽고 나면 전구는 다 어떻게 되나. 그가 없으면 도대체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누가 알까. 오래되어서 귀한 것을 다 오래되었다고 모두 버리지는 않을까. 오무사에 다녀오고 나면 이런 생각들로 나는 막막해지곤 했는데, 수리실을 찾아오는 사람들 중엔 수리실과 여 씨 아저씨를 두고 이것과 비슷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어서 나는 그때마다 수리실의 내력을 생각해 보고는 했다.




114.

돌아가신 지가 오래라 그런 기억이란 희미해질 법도 한데 도무지 그러지가 않아서, 나는 이 부근을 그런 심정과는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가 없는데  슬럼이라느니,라는 말을 들으면 뭔가 억울해지는 거예요. 차라리 그냥 가난하다면 모를까, 슬럼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치 않은 듯해서 생각을 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라고 무재 씨는 말했다.

언제고 밀어 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까,  슬럼,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




141.

마뜨료슈까는요,라고 무재 씨가 강판에 무를 갈며 말했다.

속에 본래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알맹이랄 게 없어요. 마뜨료슈까 속에 마뜨료슈까가 있고 마뜨료슈까 속에 다시 마뜨료슈까가 있잖아요. 마뜨료슈까 속엔 언제까지나 마뜨료슈까. 실롭로 반복되고 있을 뿐이지 결국엔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있던 것이 부서져서 없어진 것이 아니고 본래 없다는 것을 확인한 것뿐이죠.




144.

은교 씨, 나는 특별히 사후에 또 다른 세계가 이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고요, 사람이란 어느 조건을 가지고 어느 상황에서 살아가건, 어느 정도로 공허한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인생에도 성질이라는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본래 허망하니, 허망하다며 유난해질 것도 없지 않은가, 하면서요. 그런데 요즘은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요.

어떤 생각을 하느냐고 나는 물었다.

이를테면 뒷집에 홀로 사는 할머니가 종이 박스를 줍는 일로 먹고산다는 것은 애초부터 자연스러운 일일까, 하고.

무재 씨가 말했다.

살다가 그러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오로지 개인의 사정인 걸까, 하고 말이에요. 너무 숱한 것일 뿐, 그게 그다지 자연스럽지는 않은 일이었다고 하면, 본래 허망하다고 하는 것보다 더욱 허망한 일이 아니었을까,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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