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 『해질 무렵』 & 황정은, 『야만적인 앨리스 씨』
1.
어릴 적, 작가가 되고 싶다는 내게 엄마가 늘 하던 말은 "밥은 어떻게 벌어먹고 살래, 이 철없는 것아"였다. 소설은 늘 골방에 처박혀, 굶주리며, 추위와 싸우며, 써야 한다는 것이 엄마의 논리. 뇌에 주름이 생기고, 문학이 밥 먹여 주진 않는단 말에는 (슬프게도) 어느 정도 동의를 하게 되었으나. 문학의 가치에는 한치의 의심도 없다.
내가 믿는 문학은, 거울이고 돋보기이며 현미경이다. 또 어쩔 땐 태양이기도 하고, 지마켓에서 오천 원주고 산 휴대용 LED램프이기도 하다. 어떤 모양이든 "비추는 것"이 바로 문학인 것이다. 문학이 비추는 것은 현실의 부조리, 틈, 허점 등 경계에 선 것들. 제대로 보자면 얼굴이 찌푸려지고, 그래서 현실에서는 쉬쉬 되는 것들을 문학 작품 속에서 중심이 된다. 이것이 바로 문학의 가치이며, 내가 문학을 사랑하는 이유다.
2.
황석영 작가의 신작 『해질 무렵』에는, 이 리얼리즘의 대가가 찾아낸 사회의 암적인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곰팡이 꽃이 핀 반지하에 살면서 야간 알바로 먹고사는 극작가. 고시원을 전전하며 하루 벌어먹고사는 비정규직 노동자. 달동네 꼬마들을 모아다가 구두닦이 사업을 벌인 양아치. 그리고 달동네에서 벗어나 주류사회에 입성한 개천용까지. 과거와 현재, 부자와 빈자를 가로 세로로 엮어가며, 거대한 이야기 조각보를 만들어내니 그게 바로 작품 속의 사회이자, 이 나라의 모습이다. 지극히 사실적이고, 현실적이며, 불편하고 꺼림칙하다.
3.
이 사실적인 이야기를 누군가는 평범하다고 평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분명한 건, 이것은 황석영만이 쓸 수 있는 소설이다. 인생사 수많은 굴곡을 지나왔기에, 저 작품 속 달동네 바닥과 정계 정상도 경험해봤기에 균형감 있게 각각의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작가는 대규모 횡령 혐의에 관련한 건축가를 대놓고 비난하지도, 또 동네 양아치에게 겁탈당하고 첫사랑에게 버림받은 여성을 연민하지도 않는다. 그저 그들의 모습을 그대로 그리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작품 속에는, 죄를 지은 이들은 있지만 그렇다 할 악인이 없다. 각자 자신의 논리에 따라 삶을 선택해 갔을 뿐.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작가가 '개천용'들을 대변한다거나, '도시화/성장'에 대해 변명을 하진 않는다. 다만 판단을 독자들의 몫으로 넘겨주었다.
0.
그리고 질문한다, 이 방향이 맞는 것인지 생각해보라고.
2.
작품 속 사건과 인물들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에 앞서, 『해질 무렵』과 남매 같은 또 하나의 작품을 떠올려본다. 역시나 황씨 성을 가진 1976년 생의 작가, 황정은의 『야만적인 앨리스 씨』. 이 작품은 재개발을 앞둔 동네 '고모리'에서, 어머니를 비롯 사회의 '씨발스러운' 구타를 견디며 살아가는 앨리시어와 그의 동생에 관한 이야기다. 책의 제목에서 느껴지듯, 소설은 폭력으로 시작해서 폭력으로 끝이 난다. 앨리시어가 동생에게, 앨리시어의 어머니가 형제에게, 또 도시가 사람들에게 가하는 폭력까지.
4.
'재개발'이라는 소재를 놓고 봤을 때, 황석영의 소설은 가해자와 피해자 두 입장을 균형 있게 다루는 반면 황정은의 소설은 철저한 피해자, 폭력의 대상을 집중해서 조명한다. 또 황석영의 소설의 배경은 재개발 이전과 이후- 두개의 시간에 중점적으로 분배되어 있는 반면 황정은의 소설은 재개발이 이루어지는 그 순간에 집중하고 있다. 또한 두 작품은, 유사한 사건을 각기 다른 모습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 :
119.
지랄하네.
그렇게 평가하고도 앨리시어의 어머니는 소복을 거실에 펼쳐둔다. 모레 아침이 되었을 때 그녀는 고구마를 베어 먹으며 옷고름을 만지작거리다가 아들 둘을 거실로 불러내 소복을 입힌다. (...) 재미가 있겠다고 그녀는 말한다. 꼴통년들이 이렇게 입고 나온단 말이지, 응? 재미가 있겠어.
내가 그 꼴들을 한번 봐야겠다, 하고 그녀는 말한다.
담뱃가게 앞에 고모리 사람들이 모였다. 소복 위로 점퍼나 외투를 입은 여자들이 입김을 뿜으며 출발을 기다린다. 통장의 다섯 살짜리 손녀가 옷고름을 팔랑거리며 여자들 틈을 돌아다닌다. (...) 미성년자를 제외하고 서른두 명이 모였다.
180.
... 저기 폭격을 맞은 듯한 무너진 건물 모퉁이에 주인 잃은 비쩍 마른 개 한 마리가 서성인다. 주로 아낙네들이 앞장선 철거 반대 주민 시위대는 제각기 서투른 글씨로 피켓을 들고 외치며 서 있다. 나도 병구와 함께 현장 시찰을 갔다가 먼발치에서 바라보던 풍경들이다. 우리는 철거용역들이 그들을 해산시키고 불도저와 포클레인을 진입시키기 전에 차마 못 보겠다는 듯이 황급히 차에 올라 그곳을 떠나곤 했다.
154.
질식사였다. 기도에 끈적끈적한 모래가 가득해 오니토 속에 묻힌 뒤로도 얼마간 숨 쉬려고 노력했다는 결과가 나왔다. 모래의 무게로 가느다란 뼈들에서 골절이 발견되었고 그 밖에 도저히 사고의 영향이라고는 볼 수 없는 멍과 긁힌 자국들이 발견되었다. 하수 처리장 사고 이후 사흘이나 지난 시점에서 발견된, 구타 흔적들로 가득한 미성년의 사체에 관해 세상은 할 말이 많은 듯 보였다. (...) 부옇게 처리되었거나 모자이크로 조각난 얼굴을 하고 그들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몰랐다... 그 집하고 간격이 멀어 우리 집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했다... 알았는데 남의 집 사정이라 개입할 수 없었다... 그 집 애엄마가 평소에도 사람이 유난하고 쉽지 않아서... 애들이 좀 덜떨어졌다... (...) 기타의 평가와 비난이 앨리시어의 집을 중심으로 고모리 일대에 쏟아졌으나 소낙비처럼 한순간이었다.
126.
용역들에게 이런 일은 너무도 쉬운 일이어서 서두르지 않고 느릿느릿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 아이들은 울며불며 끌려나오는 어른들을 따라오는데 말라깽이 소년이 뭐라고 괴성을 지르며 거대한 손처럼 움직이기 시작한 포클레인 쪽으로 뛰어갔다. 아무도 뭐라고 주의를 주거나 말릴 겨를이 없는 중에 아이는 방향을 돌리는 기계의 쇠팔에 정통으로 얻어맞았다. 아이의 가냘픈 몸이 바람에 날린 빨래처럼 위로 흐느적 솟았다가 툭 떨어졌다. (...) 김민우는 앰뷸런스를 불렀고 본사에도 전화했다. 피투성이의 가족들이 미친 듯이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소년은 현장에서 절명했는데 지적 장애아였다고 한다. 기자들이 몰려왔고 공사는 한동안 중단되었다.
0.
같은 듯 다르게, 또 다른 듯 한 방향으로. 마치 남매 같은 두 작품이 전한 내용은 폭력에 관한 것이었다. 글의 각도도 다르고 온도도 달랐지만, 그 진의를 파악해내는 것은 독자의 몫.
황석영 작가가 작품을 쓰기 전에 황정은의 책을 읽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어쩐지 그가 읽어 봤을 것만 같다. 『해질무렵』을 읽는 내내 앨리시어를 떠올리고, 기어코 책장 속에서 책을 다시 꺼내 이런저런 구절들을 읽고 여기에 옮긴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을 테니까.
5.
"나는 내 아이의 이름을 민우라고 지었습니다. 김민우. 나는 그 애가 우리처럼 어렵고 가난해도 행복했으면 했지요. 그런데 우리가 뭘 잘못한 걸까요. 왜 우리 애들을 이렇게 만든 걸까요."
작품 속 차순아가 첫사랑이던 박민우에게 보낸 편지의 마지막 문구.
박민우든, 차순아든, 아니면 무슨 회장이나 양아치든, 황석영은 그들을 선인과 악인으로 가르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잘못을 저지른 한 사람이 있었던 게 아니라, 모두가, 각각의 잘못을 갖고 있으니까. 그리고 각각의 잘못이 사회 안에서 하나가 되어, 지금의 현실을 만든 거니까.
0.
즉, 차순아의 아들 김민우도, 또 『야만적인 앨리스 씨』에서의 앨리시어와 앨리시어의 동생도- 사회의 구조 안에서 아픔을 겪고 있는 거니까.
6.
황석영이 작가의 말에서 밝혔듯, "지난 세대의 과거는 업보가 되어 젊은 세대의 현재를 이루었다." 과거가 업보가 된 것은 그들이 악해서라기 보다, "망각" 때문이다.
과거와 현재가 이어져 있고
내가 너와 이어져 있으며
또 우리가 사회와 이어져 있다는 사실과,
그로 인한 책임 - 즉 "책임에 대한 망각" 때문.
0.
이 작품을, 주인공 박민우가 앨리시어와 앨리시어의 동생에게 하는 사과로, 작가 황석영이 우리에게 주는 사과로, 나아가 피눈물이 나는 조언으로 읽는다면 너무 거창한 독서인 것일까.
7.
그리고 나는 세월호를 다시 생각한다.
8.
과거가 업보가 되어 현재를 이룬다면, 또 현재가 업보가 되어 미래를 이룬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 책임을 지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두 작품 속 (사회로 인한) 폭력의 대상이 된 이들 - 비정규직 노동자 박민우와 가난한 극작가 정우희. 그리고 앨리시어와 앨리시어의 동생, 앨리스-과, 2014년 세월호 사건으로 인해 바닷속에 잠든 아이들은 사실상 하나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 업보를, 책임을 잊어선 안 된다.
1.
한번 더 문학.
문학을 공부하고 소설책을 소비하는 것은 내게 아무런 물질적 보상을 해주지 못한다. 밥벌이에는 하등의 도움을 주지 않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여전히 문학을 믿는다. 그것이 지니는 가치에 대해 확신을 갖는다. 이렇게 또 다시, 결코 잊어선 안 될 것들을 생각하게 했으니까. 마주하기 힘들고 지겹더라도 외면할 수 없는 현실. 그것과 나의 연결고리를, 이 사실적이고 꺼림칙한 작품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