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linn, 2017.12.07-2017.12.09
굽은 돌길을 따라 걷는다. 수 십 수백 년 동안 밟혀왔으면 그 표면이 편편해졌을 법도 한데, 여전히 동그랗게 혹은 네모나게 얼굴을 내밀고 있는 돌멩이들. 어지간히도 단단하다. 이 강인한 돌로 탈린 사람들은 길을 잇고 벽을 쌓아 올렸다. 그 어느 적병도 무너트리기 어려운 요새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요새는 지금,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로 문을 열고 이방인을 맞이하고 있다.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이 작은 도시에는 몇 개의 수식어가 겨우 붙어있다. 중세 느낌을 간직한 곳, 크리스마스마켓이 아름다운 곳, 그리고 반나절 구경하면 충분한 곳. 나는 이 수식어들에 빨간펜을 들고 첨삭을 해주고 싶다. 하나, 중세 느낌이지만 그게 마냥 낭만적인 건 아니다. 둘, 크리스마스마켓의 아름다움은 소박한 아름다움이다. (독일 대도시의 크리스마스 마켓을 기대하면 안 된다) 그리고 셋, 반나절 구경으론 절대 부족하다.
반나절 여행지라니, 세상 이렇게 무례한 말이 또 있을까. 탈린의 구시가지 골목길은 마치 감나무의 잎맥처럼 사방팔방으로 뻗어있고, 그 길목 하나하나엔 저마다의 이야기가 스며있다. 그 이야기를 다 듣기엔 수만의 시간도 부족할 텐데, 반나절은 얼마나 턱없는 소리인가. 나 역시 사흘을 머물렀지만 골목길의 절반도 돌아보지 못했다. 골목이 너무 많아서 그런 거라고, 느린 발을 위한 최고의 변명거리를 얻은 느낌이다.
탈린에서의 둘째 날 아침, 나는 태양보다 빨리 일어나 구시가지 외곽을 따라 걸었다. 가이드북마다 칭송하는 톰페아 석회암 언덕을 올라가니 도시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파스텔톤의 건물들이 오밀조밀 모여있고 그 위로 붉은 지붕들과 교회 첨탑이 여기저기 뻗쳐있는 불규칙의 전경. 올곧은 직선 하나 없는 지붕 능선은 저 멀리 바다의 해안선과 묘한 대비를 이루었다. 과연 그 명성대로 아름다웠고, 그 아름다움이 어쩐지 서글펐다.
도시가 단단한 성곽에 둘러싸이게 된 것, 또 건물들이 어지럽게 굽이치는 골목길을 따라 세워진 것은 이 곳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에스토니아는 지금의 독립국가를 이루기 전까지 수많은 나라에 의해 지배를 당해왔다. 먼 옛날 바이킹부터 독일, 스웨덴, 러시아, 폴란드, 그리고 소련까지- 바다 옆 교통과 무역의 요지라 그런 걸까. 모두가 이곳을 탐냈고, 침략했고, 강탈했다. 그러니 이곳 사람들은 단단한 돌로 벽을 세워 요새를 짓고, 그 안에서 부대끼며 살 수밖에 없었다. 탈린 구시가지가 보여주는 중세적 풍경은 슬픈 역사가 만든 결정체인 것이다.
구시가지를 빙 둘러싼 성벽의 2층 통로. 과거 보초병들이 걸었을 이 곳이 이제는 관광객을 위한 전망대로 쓰인다. 보수를 했을 텐데 계단은 가파르고 고르지 않다. 벽을 잡고 기어가다시피 해서 올라간 성벽 전망대. 옛 탈린의 병사들은 이 공중 무덤 같은 돌벽 틈에서 선잠을 자고 도시를 지켰겠지. 수백 년 뒤 한 동양인 여자가 이 곳에 올라 사진을 찍어대며 서성일 줄은 상상도 못 하였겠지. 세월은 쉼 없이 흘렀고, 그들이 목숨 바쳐 지켰던 도시는 이제 문화유산이란 명목으로 국제기구의 보호 아래 있다. 많은 게 달라졌지만 바닷바람은 예나 지금이나 차갑게 불어오고 있다. 시간을 뛰어넘은 바람이 이곳에 오른 모든 이의 옷 틈으로 비집고 들어오고 있다.
탈린의 구시가지는 자신의 몸집에 비해 많은 수의 교회 첨탑을 품고 있다. 그리스정교, 루터교, 가톨릭 등 서로 다른 본적의 첨탑들. 종교는 보통 지배층의 정신적 통치 수단이기도 하니 첨탑의 종류가 이 도시의 굴곡진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고 하면, 내가 너무 과대 해석한 걸까. 굳이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종교건물이 이토록 많은 것이 그만큼 기도가 절박했음을 뜻하는 건 사실이다. 뾰족한 첨탑이 마음을 찌른다.
구시가지 중앙 광장 근처에 있는 St.Nicholas' Church. 오래된 그리스정교 교회인 이곳은 2차 대전 중 폭격당해 불에 타고 내부가 일부 무너졌고,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복구를 했다고 하지만 전쟁의 흔적은 여전히 그대로다. 성모상이나 성인상 등의 조각들이 손이나 다리 등이 잘려나간 상태로 머물러있기 때문이다. 약간은 기괴하기도 한 내부 분위기. 그런데 마침 이 분위기가 St.Nicholas'의 상징이기도 한 Danse Macabre와 어우러져 그로데스크한 조화를 이루었다.
Good people, poor and rich take a look in the mirror, the young as well as the old, and bear in mind that no man can evoke Death when he is present, as we all can see here..
중세 말 흑사병으로 초토화된 유럽에서는 죽음을 주제로 한 '죽음의 무도 Danse Macabre' 미술 양식이 유행했다. 대충 작품의 내용은, 살아서 교황이든 왕이든 거지든 할거 없이 죽으면 다 똑같은 해골이라는 것. 탈린의 St.Nicholas' 교회엔 거대하고 멋진 Danse Macabre 판화 작품이 전시되어 있고, 덕분에 트리 장식도 해골, 기념품 모양도 해골이다. 파괴된 교회에 죽음의 무도라니, 이 얼마나 절묘한 조화인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다시 또 톰페아 언덕. 살면서 본 교회 중 가장 화려한 교회인 Alexander Nevsky Cathedral과 그랜드부다페스트호텔이 생각나는 국회의사당이 마주 선 길목에 섰다. 교회는 20세기 러시아가 에스토니아를 통치하던 시기에 지은 그리스정교 교회이고, 국회의사당은 13세기경 덴마크인이 지은 성이다. 이 작은 언덕에 침략자들은 정복의 깃발을 이다지도 단단하게 세워놓았다. 그건 이제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관광객들은 이 고운 핑크빛 건물들을 연신 카메라에 담을 뿐이다.
나 역시 렌즈를 앞뒤로 들이대며 건물을 이리저리 찍어댔다. 마침 시간이 아침이라 그런지 국회의사당에서는 에스토니아의 국가가 흘러나왔는데, 길을 가던 핀란드 여행자가 놀란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었다.
"이 노래 멜로디 우리나라 국가랑 똑같아."
나중에 찾아보니 핀란드의 작곡가가 지은 노래고, 북유럽에 유행가처럼 퍼졌다가, 비슷한 시기에 독립한 두 나라가 각기 다른 가사를 붙여 국가로 만든 거라고. 이유야 어찌 되었든 두 건물 사이 길목에 서서 세 개의 이국을 동시에 만난 것도 신기한 일이다. 이 작은 도시의 일개 언덕에 몇 권의 대서사시가 흐르고 있다.
탈린은 기대 이상으로 아름다웠고, 그게 나에겐 무척 슬프게 다가왔다. 유독 슬픔이 컸던 이유는 사실 십이월의 궂은 날씨 때문일 수도 있다. 탈린을 떠나야 하는 날 아침. 처음으로 맑은 하늘을 만났고, 햇빛을 받아 더 동화적인 분위기의 건물들을 지나쳤으며, 전통옷을 입고 하루를 시작하는 주민들과 눈인사를 했다. 구시가지의 입구 Biru Gate 앞 꽃시장에선 색과 향을 뽐내고 있는 장미와 크리스마스리스 무리를 만났고, 형광색 안전조끼를 입은 어린아이들의 사뿐한 걸음걸이를 바라보기도 했다.
이건, 말하자면 평화로운 아름다움이었다. 나는 짧은 여행을 끝내는 와중이었지만 슬픔을 느끼지 않았다. 지난 사흘간의 슬픔을 거짓 혹은 감정의 과잉이었던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이 평화가 오히려 다행스러웠다. 그래, 이 아름다운 곳에서 슬픔만을 느끼고 살아갈 리가 없다. 이 곳 사람들은 꽃을 즐기고, 자주 웃으며, 골목길 구석구석을 오다니며 살아왔고, 또 살아갈 것이다. 그러는 게 또 탈린다운 삶일 것이다.
탈린다운 삶이라고, 내가 써놓고도 사실 우습다. 일주일도 채 머물지 않았던 주제에 뭘 안다고. 다만 나는 다시 그곳의 돌멩이를 생각한다. 수백 년이 지나도 마모되지 않는 돌길. 그 돌길이 사방팔방 굽이치는 골목 하나하나. 골목을 단단히 품은 성곽. 그 성곽을 따라 올라가면 보이는, 벽돌로 지어 올린 교회와 첨탑까지. 단단하고 아름답고 슬픈 모든 돌멩이들. 감히 말하건대, 탈린다운 삶이란 이 곳을 수놓은 돌멩이를 닮았을 것이다. 짓밟히지만 단단한 것. 아름답지만 슬픈 것. 슬프지만 다시 또, 단단하여, 결국엔 평화로운 것.
발바닥에 닿았던 모난 돌길의 표면이 여전히 생생하다.
내가 잠시 걸었던 탈린의 삶이 머나먼 꿈결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