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3.01-2017.03.05, DaNang&HoiAn)
이른바 요즘 뜬다는 여행지, 베트남 다낭.
다낭을 추천하는 가이드북이나 블로그 게시글은 셀 수 없이 많은데 그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여행 일정은 3박5일로 잡고 다낭공항으로 입국해서 미케비치 근처 고급 리조트에 숙박, 다낭대성당과 바나힐 혹은 오행산 구경, 롯데마트에서 쇼핑, 그리고 하루 시간 내서 호이안 야경 보고 오기. 어쩌면 다낭 여행이 유행하게 된 것도 이 심플한 여행코스 덕이 아닐까. 짧은 일정이라도 별 어려움 없이 스케줄 꽉 채워 놀다 올 수 있으니 말이다.
나의 4박6일 여행도 가이드북에서 추천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책에서 배운 대로 멋진 수영장 딸린 리조트에 묵고, 핑크빛 대성당 앞에서 사진 찍고, 세계 5대 해변이라는 미케비치를 산책한 다음에 해산물을 먹고. 다만 호이안을 당일치기가 아닌 이틀 숙박으로 계획을 세운 게 나름의 반항이었달까.
지금이야 다낭이 베트남 중남부를 대표하는 상업도시로 부상했지만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그 지역을 대표하는 도시는 호이안이었다. 호이안은 중국 화교, 일본인은 물론이고 인도인, 유럽인까지 드나들던 국제항구도시였는데, 그 흔적은 구시가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알록달록한 유럽풍 이층 건물들, 지붕을 이고 있는 일본인 다리 내원교, 화교들의 모임 장소 각종 회관들, 박물관에 전시된 네덜란드풍 도자기와 가죽공예품까지. 볼거리가 많겠다 싶어 호이안에다 여행의 방점을 찍은 것이다.
호이안은 전 세계의 여행자가 모여드는 관광도시지만 몇 가지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과거 교통의 메카였단 게 무색하게 기차역 하나 없는 곳이라 다낭에서 호이안까지 택시를 타고 가야 하고, 호이안을 돌아다닐 땐 차도인지 인도인지 구분 안 되는 길을 걸어야 한다. 그뿐이랴, 뽀얀 먼지를 분 칠한 채 서있는 건물들을 보면 공중화장실 사용은 엄두도 안 나서 맥주 한 잔, 커피 한 모금 마시기가 두렵다. 기온이 30도까지 치솟는 여름 날씨에도 말이다. 어쩐지 인어공주가 생각도 난다. 그녀가 두 다리를 얻는 대신 목소리를 잃었듯이, 호이안은 유네스코 지정 문화유산이 되는 대신 옛 모습 그대로 박제된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곳이 불편한 '구'시가지임을 알면서도 사람들이 앞다투어 몰려들고 있으며, 그 누구 하나 불편함에 답답해하는 얼굴이 아니란 사실이다. 마치 생전 대도시의 편리는 단 한번 경험해본 적 없다는 듯이. 느리게 걷는 게 본래의 속도라도 되는 듯이. 사람들은 유유자적 쉬면서 길을 걷고, 먼지 낀 도시 구석구석을 구경한다.
이렇게 느리고, 불편한 게 일상이라면 어떻게 될까. 발전 없는 삶이라 도태되고 끝내 몰락하게 될까. 아니면 그 상황을 탈피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할까. 조급증을 앓은 지 오래인 나는 이곳의 속도에 쉽사리 적응을 못해 걷는 와중에 이런 생각을 했고, 그러면서도 동시에 다음 일정과 저녁식사 메뉴 따위를 고민했다. 부지런한 성격 탓이라고 자위하지만, 사서 고생이라는 생각이 한편으로 들기도 한다. 덥고 피곤한데 할 일(생각)까지 많고. 짜증이 폭발하려는 순간에 길 위에서 강아지 한 마리를 만났다. 등불 가게 앞 그늘진 바닥에 배를 착-깔고 엎드려 있던 똥강아지 녀석.
동물을 싫어하는 나는 (다만 그 와중에) 뒷모습만 몰래 찍고 길을 비켜 걸었고, 강아지를 사랑하는 엄마는 우쭈쭈 소리를 내며 녀석의 관심을 사려했다. 그러나 녀석은 명상이라도 하던 중이었는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목줄 하나 채워져 있지 않으니 언제든 달려들 수 있었을 텐데. 간간히 꼬리만 흔들뿐, 이토록 인간에게 무심하다니! 몇 년째 내 발자국 소리에 목이 쉴 때까지 짖어대는 아랫집 방울이와 옆집 심바를 겪어온 나에겐 너무나도 생소한 일이었다.
더 놀라운 건, 이게 시작에 불과했다는 사실. 수많은 강아지가 목줄을 하지 않은 채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이건 틀린 표현이다. 그들은 그 누구를 기다리거나 신경 쓰지 않고 그저 각자의 견생을 살고 있었을 뿐이다. 호이안 구시가지는 국가와 유네스코에서 집중 관리하는 곳이라고 입장료도 내고 들어가야 했는데, 막상 들어가 보니 이 오래된 동네의 주인은 그 어느 누구도 아닌 강아지들인 모양. 나는 그들에게 양해를 구하듯 천천히 걸었다. 햇살 아래 태연히 늘어진 그들을 지나치다 보니, 그제야 바삐 굴러가던 머리가 한숨 좀 돌리는 것 같았다.
파란색 벽 아래 그늘진 돌바닥
호이안에서 가장 시원한 자리에 앉아
능숙한 발놀림으로 그루밍하는 강아지
나랑 같이 놀자-
좁은 길로 쏙 들어가 버리는 쪼그만 친구 앞에서
꼬리 흔들며 놀자고 조르는 중
너 그 털옷 좀 더워 보이는데,
그늘에서 좀 쉬지 그래
주인 그림 지키고 앉아있으랬더니 햇살을 이불 삼아 잠을 자는 모양
설마 물진 않겠지 싶어서 옆에서 알짱거렸더니
인간 따위 관심 없는 견님께선 시크하게 가게 안으로 쏙 들어가 버린다
새끼는 배가 고픈지 걸어가면서 엄마 젖을 먹겠다고 달라붙고
엄마는 귀찮을 텐데도 제 새끼를 내치진 않는다
인간이나 개나, 한국이나 베트남이나
엄마는 극한직업
길가의 강아지들 뒤꽁무니를 뒤쫓다 보니 어느새 강 건너편까지 걸었다. 잔잔한 물결과 오후의 햇살, 조금은 한적한 이 곳에는 강아지 대신 한 커플이 앉아있었다. 색 바랜 나룻배와 마주 보고 앉아 기타 줄을 뜯는 남자와, 그 옆에 신발도 벗고 편히 앉아 노트에 글을 쓰는 여자. 나는 한동안 이 두 사람에 혼을 빼앗겼는데, 평생을 꿈꿔온 '음악하고 글 쓰고 여행하는' 삶의 형상을 마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 둘의 모습이 어쩐지 낯설지 않다. 옆에서 누가 바라보든 말든 가만히 앉아서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 바로 좀 전 호이안 구시가지에서 만난 강아지들과 비슷했다.
나는 궁금했었다. 느리게 산다는 건 도태된다는 뜻이 아닌가, 하고 의심했었다. 이 얼마나 멍청한 생각이었는지. 호이안 구시가지에서 관찰한 바, 동물이든 사람이든 느린 속도에 맞춰 사는 게 세상 가장 편안하고 행복한 일 같아 보였다. 아니 그들이 실제로는 불편해했는지, 피곤해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가장 본인다운 삶인건 확실해 보였다. 무더위에 털옷 입고서 놀고 싶어서 꼬리 흔드는 강아지도, 강가에 털퍼덕 앉아서 글 쓰는 사람도 전부. 각자 본연의 삶을 살고 있는 느낌.
호이안을 여행하기 전, 이곳에 대한 기대는 '예스럽고 이국적인 어트랙션' 정도였고, 2박3일이면 볼거 충분히 다 보겠지 싶었다. 그마저도 가이드북에서 일러주는 것보다 넉넉하게 계획을 세운 것이라 자부했는데, 후회가 크다. 적어도 2주는 머물다가 왔어야 했다. 느린 속도로 걸을 때 볼 수 있는 게 있고, 그 느린 걸음으로 보기에 이 낡은 도시는 너무나 크다. 먼지 낀 옛도시 구석구석 수많은 안단테의 삶이 숨어있다. 안단테로 걸을 때에만 볼 수 있는 풍경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