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8.23 - 2017.08.26, 제주
어쩌자고
시건방지고 버릇없는 나에게도 좋은 인연이 종종 불어와
평생 갚을 길 없는 신세를 자꾸만 지고 산다.
여름과 가을 사이의 제주.
길눈이 어두운 나는 고목나무의 매미처럼 S의 옆에 착 붙어서 따라다녔고, S는 내가 성가실 순간마다 화내는 대신 손을 잡아주었다. 선함이 고달프고, 고달픈 선함을 보는 게 고달팠던 시간. 그래도 사진첩에는 그 어느 여행 때보다도 웃는 얼굴이 많이 담겨 있다. 이 또한 고맙다면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중에 이 제주여행을 추억할 땐 울었던 순간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 넘치도록 꽉꽉 채워 웃어댄 삼박사일 중에 울었던 순간은 단 일분 남짓이었는데. 참을 수 없이 터져 나왔던 그 눈물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여행의 마지막 날 밤, 우리는 저녁을 먹고 나와 LP바로 향했다. 가게 안에는 LP판과 오래된 축음기, 스피커, 옛 가수의 포스터, 수동 미싱기 등 예스러운 물건들이 붙박이처럼 빼곡히 앉아있었고, 그들이 미처 다 메꾸지 못한 자리에는 제주 곳곳을 떠돌던 여행자들이 날아들어와 부유하고 있었다.
S와 나도 사흘을 떠돌다 와서 마지막 남은 한 자리를 겨우 차지해 앉았다. 여긴 사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장소이자, 숙소를 제외하고는 사전 계획한대로 방문한 유일한 장소였다. 잔뜩 기대한 곳에서 운 좋게 착석을 했고, 칵테일을 마셨고, 사랑하는 음악을 신청해 왕왕 크게 들었고, 마음이 살짝 붕떴다. 변명할 거린 아니지만 나는 울기 위한 만만의 준비가 된 상태. 그런 내게 S는 줄 게 있다며 눈을 감고 손을 내밀어 보라고 했다. 나 몰래 언제 감귤초콜릿이라도 샀나- 큰 기대 없이 내민 손바닥에 올려진 건 지퍼백 하나.
그 안에는 원고지 두 권과 제도샤프 한 필, 그리고 샤프심 한 통이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전혀 상상도 못 한 선물을 보자 괜히 눈물이 났다. 얼굴을 감싸고 울며 고맙다 하는 내게 S는 "제도샤프는 글씨 쓰기에 적당한 0.7mm이고 원고지는 200자 용도라 긴 글은 쓰기 어려우니 시를 쓰도록 해-"라는 말을 건넸다. "제주공항 가려면 저 앞에서 702번 버스 타야 해"라고 말할 때와 같은 톤으로, 그저 무덤덤하게.
아니 당신이 무슨 송몽규라도 되는가, 니는 시를 쓰라-고 말을 하게. 아니면 도라에몽이라도 되는가, 가방에 상상도 못 할 물건을 잔뜩 넣어가지고 다니게.
S는 집 근처 문구점이 점포정리 세일을 하길래 들어가서 이것저것 사 온 것뿐이라고 했다. 말이 쉬워 이것저것이지, S는 제 그 선한 눈으로 찾은 물건들을 장바구니에 담고, 그대로 제 여행가방에 넣어가지고 왔다. 휴족시간, 선크림, 팩, 손수건은 모두 내 것까지 두배로 챙겼고, 거기에 깜짝선물과 나침반까지! 짧은 여행에 어쩐지 가방이 묵직하더라니. 양 어깨에 그 가방을 짊어지고 내 손을 잡아주기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미안해서 얘기하진 하지 않았지만 나도 여행 전날 마트에 들러 이것저것 준비물을 샀다. 보조배터리와 멀티충전기, 얇은 원피스. 내가 산 이것저것은 오로지 나만을 위한 물건들이었다. 내가 S를 위해 준비해온 건 하나도 없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 나는 마라도에 가고 싶다고 했고, S는 최남단 섬에서 꺼낼 용도로 나침반까지 사왔었다. 그런 이에게 무슨 도라에몽이냐고 웃어대기만 했으니 난 어쩜 이렇게도 건방진 사람인가.
집에 돌아와서 원고지를 펼쳐보니 첫 장에는 편지가 적혀있었다. '꿈꾸는 아름다운 소녀에게'로 시작해서 '포기하지 않고 달려가길'로 끝나는 다정한 편지.
돌이켜보면 우리는 그간 꿈 얘기를 많이 했었다. 이제는 장래희망을 이야기하기엔 조금 부끄러운 나이가 되었는데, 그마저도 아름답다고 해주는 S는 내가 감당 못할 좋은 사람. 나는 이 다정함에 보답할 길이 없다. 그저 그가 말한 대로 시를 쓰는 수밖에, 이 없는 재주에 삶을 매달고 냅다 달려보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