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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는언니 Jul 29. 2016

20. 선택

온전한 내 몫의 삶을 위해



'내가 올해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데. 이 정도 돈, 쓸 자격 있지. 암 그렇고말고.'

늘 그렇듯 당연함인지 자기합리화인지 모를 판단의 결과, 여행 중 하룻밤 정도는 비싼 숙소에 묵어보기로 했다. 에어콘은 빵빵하게 나오고, 하얀 커튼이 드리워진 침대 위로는 붉은 꽃잎으로 하트가 장식되어 있고, 화장실에는 고급 목욕 가운과 폭신한 슬리퍼가, 테이블에는 과일과 쿠키, 차가 세팅되어 있었다. 호텔 내에는 아담하지만 수영장도 있었는데 오후 3시부터는 애프터눈 티를 무료로 제공해주었고, 아침식사로는 4가지 쨈이 곁들여진 다양한 종류의 빵이 나왔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전날까지 머물렀던 20달러 짜리 숙소가 훨씬 좋았다. 아니, '경제적으로 마음이 더 편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숙소의 가격 차이란 있으면 좋겠지만 없어도 크게 지장없는 것들이 하나 둘씩 보태지면서 격차가 벌어지는 것이다. 그걸 알지만, 없어도 크게 지장없는 것들이 내뿜는 유혹의 손길을 뿌리치기란 쉽지 않았다. 호텔을 소개하는 몇장의 사진들 속에서 그것들은 막 세수를 끝낸 아이의 얼굴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나를 위한 선물이야.' 몇 번을 고민하다 어느덧 결제 버튼을 클릭.





공짜로 지내게 해주겠다면야 고민할 필요도 없이 비싼 숙소를 선택할 것이다. 이건 생각할 여지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내가 비용을 내야 한다면? 그러니 본전을 뽑아야겠다는 정신이 발동할 수 밖에. 나는 욕조에 뜨거운 물을 채워 침대 위의 꽃잎을 쓸어다 뿌린 다음 우아하게 꽃반신욕을 하고, 더운 날씨에 굳이 가운을 걸치고 뜨거운 차를 끓여 발코니에 앉아 땀을 흘리며 마시고, 수영장에서 제공하는 무료 애프터눈티를 즐기기 위해 오후엔 일부러 밖에도 안나가고(못 나가고) 휴식을 취했다. 멋진 숙소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런데 자꾸만 전날 묵었던 숙소가 떠오르니 이상한 일이었다. 정말 딱 있을 것만 있던 곳. 예약할 때 보증금은 얼마냐고 묻자 그런 건 없다며 이름만 알려달라던 곳. 밖에 나갔다 돌아오면 환한 얼굴로 오늘은 어딜 다녀왔냐고 묻던 곳. 식당에 앉으면 투숙객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식사를 내오던 곳.






한달 후, 드디어 올 것이 왔다. 비용을 감당해야 할 시간이. 청구된 카드 내역서를 보며 후덜덜. 4가지 쨈의 아침식사와, 보드랍고 하얀 가운, 오후의 애프터눈티, 수영장, 침대 위의 붉은 꽃잎들이 차례로 작별을 고하며 빠져나갔다. 순식간에 줄어든 통장의 숫자들을 바라보며 쩝. 쓸땐 좋았지. 어릴 적 엄마를 따라간 성당에서 외우던 기도문의 한 구절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주여.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옵시며…


여행은 아무래도 비용치르기 같다. 마치 선택이 제일 힘들어 보이는듯 해도 막상 선택은 힘들지 않았다. 결재 버튼 앞에서 망설였던 건 선택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비용 때문이었다. 삶에서도 그랬던 것 같다. 누리고는 싶지만 책임지기 싫어서 갈등하고 힘들어 하고. 그러니 비용을 얼마나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가 늘 문제로구나. 하지만, 일단 비용을 치른 건? 온전히 내 몫이라는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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