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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는언니 Sep 02. 2016

29. 점괘

좋아하는 것을 하도록 해. 그게 자신에게 맞는 길이니까.


덴파사르 공항에 내리자마자 택시를 잡아타고 우붓으로 향했다. 우붓은 발리 섬 내륙에 위치해 있는 동네다. 그러니까 나는 바다는 코빼기도 보지 못하고 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비록 바다는 없지만 우붓엔 아름다운 계단식 논과 많은 힌두 사원이 있으며 걷기 좋은 산책 코스 그리고 숲과 계곡이 있었다.


이 지역은 발리 문화의 중심지로 께짝 댄스와 같은 춤 공연이 매주 열리고 전통 복장을 한 발리인들이 사원에서 열리는 종교 의식에 참가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또한 예술적 에너지가 넘치는 곳으로 그림과 목공예가 유명해 크고 작은 갤러리와 아티스틱한 가게들도 많다. 그 밖에 분위기 있는 카페와 레스토랑, 저녁마다 라이브로 음악을 연주하는 바, 요가, 쿠킹 클래스 등 장기간 머물고 싶은 매력적인 장소였다.


나는 멍키포레스트 로드에 있는 숙소에 짐을 풀었다. 근처에 실제로 원숭이 숲이 있었다. 구글에서 찾은 정보에 의하면 주술사의 집은 원숭이 숲을 지나 남쪽으로 20분 정도만 걸어가면 되는 지역에 있었다. 여기까지 찾아 왔으니 정말 만날 수 있겠지? 설마 그 동안 어디로 이사를 한 건 아니겠지? 정화수 대신 숙소 근처 바에서 라임 모히토 한잔을 시켜놓고 운을 빌었다.





끄뜻 리에르 - 의술. 힐링. 명상. 손금. 발리식 점성술. 화가. 홈스테이.


찾았다! 그의 집으로 가는 골목 입구에 다행스럽게도 간판이 걸려 있었다. 역시 만나게 될 운명이었던가! 사원처럼 생긴 집은 전형적인 발리 스타일이었다. 문이 열려있어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가보니 이른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책과 영화의 영향으로 전세계에서 점을 보러 온 것이다. 쭈뼛주뼛 서 있으니 누군가 내게 빨간 딱지를 내밀었고 거기엔 14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당신은 14번째에요. 하고 말하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비행기까지 타고 멀리 이 낯선 곳까지 와서 점을 보겠다고 번호표를 받아 쥐고 있자니 웃음이 나기도 하고 묘한 기분이 들었다.






주술사는 내 상상 속 모습과 비슷했다. 나이는 가늠할 수 없었지만 늙었고, 앞니는 빠져 있었고 게다가 무척 피곤해 보였다. 책과 영화로 인해 갑자기 불어난 전 세계에서 들이닥친 고객들을 상대하려면 그럴 수 밖에. 나는 어쩌다 보니 점을 봐주는 자리 바로 앞쪽에 앉아 기다리게 되었다. 주술사는 사람들의 얼굴과 이마를 유심히 살펴 보고, 목 뒤를 보고 그리고 손금도 차례로 들여다 보았다. 대화는 간단한 영어로 이어졌다.



“어디서 왔어? 결혼은 했어?”

- 이탈리아에서 왔고 싱글이에요. 남자 친구가 생길까요?

“왜 애인이 없어?”

- 저도 몰라요... 그래서 여기 온 거에요.

“당신은 예쁘니까 곧 생길 거야. 걱정하지마”

- 정말요? 언제 생길까요? 그리고 제 건강은 어때요?

“곧 생긴다니까. 건강은 걱정안해도 돼. 100살까지 살 거야”

이탈리아 여자는 활짝 웃으며 퇴장했다. 다음!



“어디서 왔어? 결혼은 했어?”

- 호주에서 왔고 싱글이에요. 결혼은 언제 즘 하게 될까요?”

“곧 하게 될 테니 걱정하지마.”

- 곧이요? 그럼 내년엔 하게 될까요?

“예스! 곧 하게 돼. 그리고 100살까지 건강하게 살 거야”

호주 여자도 활짝 웃으며 퇴장했다. 다음!



“어디서 왔어? 결혼은 했어?”

- 싱글이에요.. 애인은...

“돈워리. 곧 생길거야!”





이건 대체 뭔가. 책 속에 있던 지혜롭고 영험한 주술사는 어디로 가고 그곳엔 마치 외워서 말하는 듯한 똑같은 점괘만 되풀이하는, 정확히 말하면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만 하는 노인이 앉아 있었다. 마찬가지로 질문도 똑같았다. 하기야 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운명의 짝이 과연 언제 나타나는가가 아니면 무엇일까. 100살까지 산다는 건 발리식으로 말하자면 오래 산다는 의미인듯 했다.


2시간을 그렇게 엿들으며 기다린 후 드디어 차례가 왔다.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주술사가 질문을 하기전에 먼저 말을 꺼냈다. 저는 앞으로 무엇을 하면 좋을까 고민이에요. 그러니까 미래가 궁금해요. 갑작스런 질문에 그는 조금 당황한 듯 했다. 점괘 시나리오에 없던 일이었나 보다. 그는 내 얼굴과 이마 그리고 손금을 다시 찬찬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목 뒤와 어깨, 팔 안쪽과 팔꿈치도 보고 무릎부터 발목까지 다리의 모양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물을 한모금 마시더니 입을 떼었다.


“당신은 책을 좋아해. 아마도 컴퓨터로 하는 일, 그리고 책을 쓰거나 책과 관련된 일을 하게 될 거야. 그 일이 당신에게 좋아. 좋아하는 일을 하면 힘이 생기지. 그 힘이 당신의 미래를 럭키하게 만들어 줄 거야. 믿어도 돼.”


제가 정말 그런 일을 하게 될까요?


“그건 나도 몰라. 나는 그저 보이는대로 말할 뿐이야. 하고 안하고는 당신에게 달려있지. 좋아하는 것을 하도록 해. 그게 자신에게 맞는 길이니까. 그리고..... 100살까지 살 거야”


그는 내 손을 잡으며 활짝 웃었다. 나도 활짝 웃었다. 책 속의 끄뜻리에르가 내 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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