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억하는 나의 첫 여행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숙소 방 창문을 반쯤 열어두고 빗소리를 듣는다. 나뭇잎에 비가 와서 후둑후둑 부딪히는 소리가 좋아서 침대에 누워 한동안 빗방울들의 즉흥 연주를 감상한다. 이따금씩 동네 개구리들이 코러스를 개굴개굴 넣어준다. 아, 좋다. 가끔은 이렇게 널부러져서 자연의 소리를 들으려고 여행을 왔나 싶을 만큼 이런 순간들이 그리웠다.
사실은 나는 비를 싫어하는데. 어쩌면 비를 싫어하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도시에서의 삶은 비가 오는 것도, 눈이 내리는 것도, 반가워하기 보다 불편하고 귀찮은 일이 되어버렸다. 마음이 괜스레 센티멘탈해져가지고 누워서 이리 뒹굴 이 생각. 저리 뒹굴 저 생각.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아침부터 촉촉하게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우비에 장화를 신고 집을 나선 나는 분명 학교를 향해 걷기 시작했는데... 가다가 작은 물웅덩이에서 개구리인지 뭔지를 발견하곤 신기해하며 그것의 뒤를 쫒기 시작했다. 아파서 쓰러져도 가야할 학교 따위는 깡그리 잊은 채. 비가 오니까 학교에 가기 싫은 탓도 조금은 있었을 것이다. 신이 나기도 했다가 무섭기도 했다가 오후 내내 그렇게 낯선 동네를 구경하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엄마한테 엄청나게 혼이 났었지...
비가 오면 문득 떠오르곤 한다. 그 날은 내가 기억하는 나의 첫 여행이었으니까. 한번의 외유로 졸업식날 친구들은 다 받는 개근상을 나는 받지 못했다. (요즘 초등학교에서는 개근상을 주는지 모르겠다. 내가 어렸을 때는 개근상이 우수상 다음으로 중요한 상이었다) 하지만 개근상과 비오던 그 날을 절대로 바꾸진 않을 것이다. 그 날이 없었다면 내 인생은 심심하고 무덤덤하게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지금껏 어디론가 나를 끌고가는 힘은 그런 날에서 나왔으므로.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양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태양보다 냉철한 뭇별들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 김중식 <이탈한 자가 문득>
우산을 챙겨들고 갤러리로 향했다. 비가 와서인지 사람이 없었다. 혼자만의 자유를 만끽하며 그림 사이를 어슬렁 어슬렁. 그러다 한 그림 앞에서 걸음이 멈춰졌다. 해는 지고 구름 사이로 반달이 뜬 저녁, 작은 배낭을 멘 여행자가 가던 길을 멈추고 멀리 노란 불빛이 새어 나오는 집을 바라보고 있었다.
집을 그리워하면서도 때가 되면 기어이 홀로 어디론가 떠나야만 하는 여행자. 불빛 가까이 다가가고 싶으면서도 길을 재촉하는 여행자. 옆에 제목이 붙어 있었다.
나도 우두커니 서서 밤 하늘의 달과 불빛이 새어 나오는 집을 바라 보았다.
잠시,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