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사소한 것들

그러니까 아쉬움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by 노는언니


여행의 마지막 날, 공항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물색하던 중 뇨만을 알게 되었다. 그는 거리의 다른 기사들처럼 처음부터 택시비를 부풀리지 않았다. 숙소 직원에게 미리 알아본 적정 가격에서 조금 더 붙인 금액을 불렀고 우리는 곧 흥정에 들어갔다. 나는 20만 루피면 좋다고 했고 그는 25만 루피는 받아야한다고 했다. 몇 번을 옥신각신하다가 22만 5천 루피로 하자고 뇨만이 먼저 제안을 해왔다.


“한쪽만 행복한 건 좋지 않아. 둘 다 행복해야 좋지. 조금씩 양보해서 둘 다 Happy. OK?”

OK.


“발리에선 뭘했어?”

요리도 배우고... 산책도 하고...


“께짝댄스는 봤어?”

No.


“낀따마니 화산은?”

가려고 했지만 좀 멀어서...


“그럼 서핑은?”

서핑! 그것도 못했는데. 난 대체 뭘 한 걸까?


“괜찮아. 괜찮아. 이번이 끝이 아니니까. 다음을 위해 남겨둬야지. For the next time! "

그나저나 뇨만은 아름다운 발리에 살아서 정말 좋겠어요!


“음...... (백미러를 통해 나를 한번 흘긋 쳐다보더니) YES!”



DSC_0237.JPG 산책길에 만난 풍경 @Ubud, Bali



그는 허허허 웃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 차창 밖으로 어둠이 내려앉고 우리는 우붓과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아쉬운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여행 마지막 날’일 것이다. 아무리 힘들고 시큰둥한 여행일지라도 마지막 날이 되면 봄날 눈 녹듯 마음이 그만 스르르 풀어져 버린다. 머물러 있을 때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들이 갑자기 성큼 다가와 크게 느껴진다.


내일 하지뭐. 내일 가야지. 하던 것들을 결국 마음에만 담아두고 다음을 기약하고 만다. 언제 또 다시 오게 될지 알 수 없으면서도. 하지만 뇨만 말대로 다음을 위해 남겨두는 것도 괜찮을 테지. 그래야 언젠가 다시 올 수 있을테니까. 왜냐하면 여행은 늘 그런거니까. 아쉽지 않다면 그건 여행이 아니니까.



DSC_0259.JPG 발리에서 인생망고주스! 발견



“이건 내 번호야. 다음엔 미리 전화를 하면 내가 픽업을 나올 수 있어. 그때는 20만 루피만 받을게. OK?”


뇨만은 또 허허허 웃으며 명함을 내밀었다. 그도 알고 있다. 여행자들은 이렇게 떠나면 언제 다시 오게 될지 알 수 없다는 것을. 그런데, 만약, 다시 온다면 께짝 댄스나, 낀따마니 화산이나, 서핑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아쉬움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타박타박 산책을 다녔던 흙 길 때문이라고. 단골 카페의 내가 앉았던 자리 때문이라고. 싸고 맛있었던 망고주스 때문이라고. 빗소리를 듣던 아침과 뜨거운 오후의 햇살때문이라고. 눈 인사를 나누던 사람들 때문이라고. 매일 아침 숙소 방 앞에 놓여있던 두 개의 꽃송이 때문이라고. 그런 풍경들을 두고 떠나왔기 때문이라고. 사소하지만 내겐 더없이 소중했던 것들을.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이유도 그러했다. 일요일 오후의 낮잠을 즐기던 소파. 폭신한 내 베개. 읽고싶은 책들. 냉장고의 먹다 남은 치즈. 친구와의 커피 약속.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그와 식탐쟁이 우리 고양이.



pic_50.jpg



명함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한층 무거워진 가방을 어깨에 울러멘다. 공항은 여전히 새로운 여행자들을 토해내고 있었다. 막 도착한 얼굴들은 피곤해 보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달떠 보였다. 얼마전 내 모습이었다. 밤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거기엔 올 때보다 가득찬 달이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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