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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는언니 Oct 03. 2016

37. 사소한 것들

그러니까 아쉬움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여행의 마지막 날, 공항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물색하던 중 뇨만을 알게 되었다. 그는 거리의 다른 기사들처럼 처음부터 택시비를 부풀리지 않았다. 숙소 직원에게 미리 알아본 적정 가격에서 조금 더 붙인 금액을 불렀고 우리는 곧 흥정에 들어갔다. 나는 20만 루피면 좋다고 했고 그는 25만 루피는 받아야한다고 했다. 몇 번을 옥신각신하다가 22만 5천 루피로 하자고 뇨만이 먼저 제안을 해왔다.


“한쪽만 행복한 건 좋지 않아. 둘 다 행복해야 좋지. 조금씩 양보해서 둘 다 Happy. OK?”

OK. 


“발리에선 뭘했어?”

요리도 배우고... 산책도 하고...


“께짝댄스는 봤어?”

No.


“낀따마니 화산은?”

가려고 했지만 좀 멀어서...


“그럼 서핑은?”

서핑! 그것도 못했는데. 난 대체 뭘 한 걸까?


“괜찮아. 괜찮아. 이번이 끝이 아니니까. 다음을 위해 남겨둬야지. For the next time! "

그나저나 뇨만은 아름다운 발리에 살아서 정말 좋겠어요!


“음...... (백미러를 통해 나를 한번 흘긋 쳐다보더니) YES!”



산책길에 만난 풍경 @Ubud, Bali



그는 허허허 웃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 차창 밖으로 어둠이 내려앉고 우리는 우붓과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아쉬운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여행 마지막 날’일 것이다. 아무리 힘들고 시큰둥한 여행일지라도 마지막 날이 되면 봄날 눈 녹듯 마음이 그만 스르르 풀어져 버린다. 머물러 있을 때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들이 갑자기 성큼 다가와 크게 느껴진다. 


내일 하지뭐. 내일 가야지. 하던 것들을 결국 마음에만 담아두고 다음을 기약하고 만다. 언제 또 다시 오게 될지 알 수 없으면서도. 하지만 뇨만 말대로 다음을 위해 남겨두는 것도 괜찮을 테지. 그래야 언젠가 다시 올 수 있을테니까. 왜냐하면 여행은 늘 그런거니까. 아쉽지 않다면 그건 여행이 아니니까.



발리에서 인생망고주스! 발견



“이건 내 번호야. 다음엔 미리 전화를 하면 내가 픽업을 나올 수 있어. 그때는 20만 루피만 받을게. OK?”


뇨만은 또 허허허 웃으며 명함을 내밀었다. 그도 알고 있다. 여행자들은 이렇게 떠나면 언제 다시 오게 될지 알 수 없다는 것을. 그런데, 만약, 다시 온다면 께짝 댄스나, 낀따마니 화산이나, 서핑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아쉬움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타박타박 산책을 다녔던 흙 길 때문이라고. 단골 카페의 내가 앉았던 자리 때문이라고. 싸고 맛있었던 망고주스 때문이라고. 빗소리를 듣던 아침과 뜨거운 오후의 햇살때문이라고. 눈 인사를 나누던 사람들 때문이라고. 매일 아침 숙소 방 앞에 놓여있던 두 개의 꽃송이 때문이라고. 그런 풍경들을 두고 떠나왔기 때문이라고. 사소하지만 내겐 더없이 소중했던 것들을.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이유도 그러했다. 일요일 오후의 낮잠을 즐기던 소파. 폭신한 내 베개. 읽고싶은 책들. 냉장고의 먹다 남은 치즈. 친구와의 커피 약속.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그와 식탐쟁이 우리 고양이. 


 



명함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한층 무거워진 가방을 어깨에 울러멘다. 공항은 여전히 새로운 여행자들을 토해내고 있었다. 막 도착한 얼굴들은 피곤해 보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달떠 보였다. 얼마전 내 모습이었다. 밤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거기엔 올 때보다 가득찬 달이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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