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순간이 파편처럼 기억을 스쳐지나갑니다. 적지 않으면 휘발됩니다. 아쉬워서 적어봅니다. 회사 가지 않는 휴일의 어느 날 단편입니다.
잘 잤습니다. 자고 일어나 청소기를 돌리고 세탁물을 정리합니다. 살랑이는 가을이 살갗에 닿아 잠을 깨워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장을 보러 가는 날입니다. 먹다남은 빵조각으로 가볍게 아침을 떼웁니다. 카누 인스턴트 커피 1개 뜨거운 물에 녹여 마시니 이제야 일어난 것 같습니다.
만들어먹을까, 아니면 장을 봐서 먹을까. 집밥을 해서 드시는 분이라면 누구나 아는 고민거리가 있습니다. 밥은 있습니다. 하지만 반찬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 고민 또한 나중으로 미루어봅니다. 그래서 장을 봐야 합니다. 씻고 나와 알로에 조금 바르는 걸로 외출준비는 끝났습니다. 뭐 어때요. 누구 만나는 일정이 없는 날인걸요.
어제까지 쏟아붓던 비는 온데간데없이 하늘이 청명하게 맑습니다. 운동화 끄는 소리조차 힐링스럽습니다. 언덕길을 흥얼흥얼 내려옵니다. 걷습니다. 걸어요. 또 걸어요. 날씨가 좋으니 사람들이 커피 한 잔을 하더라도 바깥에서 드시려 나왔나 봅니다. 싱얼싱얼, 나는 흥얼흥얼.
세탁소 아저씨 인사드리고 치킨집 사장님 인사드리고. 이 동네에 온지 1년이 다 되어가는 요즘, 저 또한 이 동네 주민들의 삶에 녹아들고 있나 봅니다. 세탁소 사장님은 중국집 짜장면을 주문하셨나 봅니다. 중국집 아저씨 오토바이가 세탁소 앞에 섭니다. 오토바이랑 세탁소를 뒤로하고 다시 걷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동네 제육볶음 맛집에 가서 포장해서 소분해먹고 싶지만 가격이 상당히 비쌉니다. 조금 멀리 있지만 나름 '반세권' (반찬가게 접근 가능한 지역) 혜택을 누려보고자 합니다. 반찬가게라고 저렴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압니다. 저의 요리실력을, 오늘 만큼은 누가 만들어준 반찬을 먹고 싶다는 걸.
요즘 길거리에서 보면 외국인 분들이 과거에 비해 정말 많이 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딘가 신나보이는 외국인분들을 보니 한 것도 없는데 나도 괜히 기분이 좋아집니다.
조금은 등에 땀이 찹니다. 꽤 걸었네요. 그래도 집에 가서 쉬면 되니까 이쯤은 '운동'이라고 해봅니다. 사람 구경도 하고 풍경 구경도 합니다. 가끔 길냥이들을 보면 이 친구들도 힘든 삶을 살고 있겠지만 그들이 바라보는 '자유'란 그 시선따라 보이는 모든 것들이 '자유' 아닐까라는 이상한 생각도 해본 적 있습니다.
목적지인 반찬가게까지 가는 길에 셀 수 없이 많은 맛집들이 있습니다. 그 안에서 나름 각자 또는 다같이 가을을 즐기는 분들이 계십니다. 배가 고픕니다. 그 안에 들어갈까말까 가게 문까지 가서 다시 걸음을 돌아나옵니다. 한 끼에 2만원 가깝다니, 누군가 같이 먹으면 몰라도 혼자 있을 때 이런 식비는 저에게 사치입니다. 아껴야죠, 아껴야 살죠.
다시 반찬가게로 갑니다. 반찬가게에서 열심히 할인 배너를 찾습니다. '3팩에 만원' 또는 '4팩에 만원' 기가 막히죠. 순대국밥집을 가서 국밥 한 그릇 먹어도 만원이 넘는 시대, 이 가게에서 반찬 3개 (또는 4개)로 3끼 (또는 4끼) 식비를 벌어드렸습니다. 밥은 집에 있는 쌀로 밥하면 되니까, 반찬만 있으면 그런대로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습니다.
맛집에 가서 사용할 수 있는 돈 아껴, 반찬가게 근처 약국에서 다 떨어진 상비약 일부를 구매합니다. 기분좋게 박카스까지 구매해서 나왔습니다. 다른 분들은 모르겠지만, 저는 박카스 10개 묶음으로 구매해 힘들 때마다 하나씩 꺼내먹곤 합니다. 요즘에는 약국에서 '박카스 디카페인' 또한 구매할 수 있더군요. 이건 다음에 도전해보려고요.
왔던 길을 다시 돌아 걸어오는 길에 저가커피가 보입니다. 맛난 음료가 당기지만 다시 한번 집에 있는 커피를 생각하고 지나칩니다. 집에 오는 내내 풍족한 나의 반찬 5개나 저렴한 가격에 구해서, 마음까지 훈훈합니다. 1인 살림 재미가 쏠쏠합니다. 식비 또한 절약한 것 같고요.
제 생각에는 집밥이란 게 고생이 들어간 만큼 더 맛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실속있는 반찬을 구해오는 길에서 흘린 땀, 쌀을 씻어 집밥을 만드는 어찌보면 그 귀찮은 과정, 다음날 먹을 수 있는 밥까지 소분해서 준비하는 고생. 이게 다 밥맛으로 돌아서 오는 것 같아요. 다음에는 식재료 좀 구해서 반찬을 만들어보려고요. 또 그 고생한 맛이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