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들었다. 3시간 전 배웅을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장을 봤다. 주로 간편식 위주로 고른 이번 장보기는 벌써부터 연말 분위기를 내뿜고 있는 거리 위 식당과는 다소 상반되었다. 어쨌든 집에 돌아와 그동안 밀린 업무를 봤다. 주로 회사일이 아닌, 나만의 시간을 활용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노곤한 허리는 의자에 깊숙이 파묻고 승모근이 사라지도록 얼굴이 어깨에 묻혀가는 태도. 친구는 태도가 좋지 않아 고치라고 몇 번이고 이야기를 했지만 저녁까지 먹고 들어온 이 시간에 이 자세가 제일 편하다.
외출했을 때 입은 옷 그대로, 환복 없이 야심한 밤을 이어가는 나만의 은밀한 글쓰기이 내 시간을 야금야금 잡아먹었다. 외출 후 씻는 시간이 늦어졌고 결국은 못 받았다.
빠른 샤워를 마치고 나온 거실에서 핸드폰이 진동하고 있었다. 여러 통의 전화와 음성사서함 메시지까지. 애타게 나를 찾는 사람은 우리 부모님뿐. 몇 시간 전까지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내다 배웅까지 해드리고 들어왔는데 무슨 일일까. 내심 다급함이 녹아든 연락은 불안을 야기한다.
전화를 받자마자 무슨 일이 없는지 물어보신다. 요즘 세상이 흉흉해서, 버스정류장에서 헤어진 후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평소 전화하면 잘 받던 아이가 연결이 되지 않아 걱정이 되었다는 말씀을 하신다. 부모님께 잘 들어왔고, 들어오는 길에 야무지게 하이라이스 재료 또한 저렴하게 구했다고 자랑하며 안심을 시켜드렸다. 내가 부모님을 걱정하듯이 부모님도 나를 걱정하고 계셨을 줄은. 츤데레-하게 '쉬어~'라는 말을 남기시고 통화종료된 수화기 너머 창밖을 바라보니 바깥이 어둡다. 역시 11월은 해가 빨리 진다.
누군가를 걱정시켰다는 죄책감보다, 이기적이게도 내 생활패턴을 돌아본다.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으니 퇴근이 늦어지면 별을 보고 퇴근하는 것도 감수해야 하지만, 되도록이면 해가 뜨고 지는 시간 안에 바깥에서의 활동을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경향이 보인다.
옛날에는 야밤의 자유로운 영혼처럼 이곳저곳 쏘아다니는 걸 무척이나 즐겼지만 지금의 나는 그러지 않는다. 해가 뜬 시간에 맞춰 일어나 하루를 보내고 해가 지는 시간에 맞춰 MBTI 극 'I' 성향이 짙은 집돌이로 변하는 것이 우리의 신체리듬에 좋다나 뭐라나.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어디서 봤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퇴근 후 무거운 어둠이 나의 공간을 둘러서기 시작하면 외부활동은 이변이 없는 한 크게 하지 않으려 한다. 조만간 퇴근 후 생존을 위한 자기개발 차원에서 나에게 시간을 투자할 수 있는 활동을 하게 될지 모르지만, 그런 일이 아니고서야 밤 시간은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으로 사용하고자 필요충분적으로 '집돌이'를 자처한다.
INFJ. 그렇단다. 나도 모르게 나의 일과는 해가 뜨는 시간에 시작해서 해가 지는 시간에 외부활동은 종료하는 올드한 사람이 되어있다. 나는, 그렇다. 조만간 나의 이런 성향에 대해 부모님께 상세히 알려드려야겠다. 걱정하지 않으시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