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기운에 얼굴이 붉어진 걸까? 아니면 무례한 말을 듣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숨겨도 숨겨지지 않는 무력감에 취하고 있는 걸까? 왁자지껄 대화의 게릴라전이 어둑어둑한 술집 연말 송년회 회식 테이블 곳곳에서 들린다. 평소 안면은 있지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던 타 부서 사람끼리 탁구 치듯이 대화를 주고 받는다. 어색한 분위기에서 화목한 분위기로 바뀌었다가 다른 자리에 재미있는 소리가 들리면 웃으면서 고개를 돌린다. 가면을 쓰고 있는 걸까? 아니면 이 순간 만큼은 다 잊고 지내는 걸까? 평소라면 냉랭한 분위기를 만들 수 있는 수위 높은 발언이 오가고, 그것에 대한 반응은 상급자와 하급자라는 단순한 조직의 논리로 순응하게 되는 자리에서 우리는 또 어느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걸까?
12월이 들어서고 예년보다는 조용한 듯한 거리에 크리스마스와 연말의 분위기가 가득 메우는 날들에 모두가 송년회 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회사라는 이름으로 마음껏 먹고 실컷 즐기고 본연의 야자타임이 만들어지는, 어쩌면 어느 정도 레퍼토리가 예상되는 송년회 그 순간 만큼을 마음 편히 누리고자 그 날을 기다리고 기다린다. 송년회. 싸우고 화해하고 억울한 일도 눈 녹듯이 없던 일로 녹이는 마법을 지닌 그 회식이 다가온다.
송년회. 술을 마셨다. 술이 참 달다. 한 잔 두 잔, 사물이 흐려보이고 사람들이 모두 재미있어 하는 것 같고. 술이 물처럼 느껴지도록 마시고 또 마신다. 어느덧 막차 끊길 시간에 헤어진다. 누구는 택시 태워 보내고, 누구는 마침 집 근처라 걸어가며 배웅하고, 또 누군가는 어딘가에서 기다리고 있는 가족을 위해 버스에 몸을 구겨넣는다.
헤어졌다. 막차 타고 집 근처 지하철역에 내렸다. 낮과는 다른 이 시간, 가로등 불빛 의지해 집으로 가는 길 오르막 내리막을 몇 번이고 지난다. 휘청휘청 터벅터벅. 궁시렁궁시렁 혼자말로 중얼거려보고 머나먼 집으로 나아간다.
마지막 오르막길 앞에 섰을 때 고생스러운 인생이 하루 또한 버텼다는 걸 알았다. 평범하면서 평범한 걸 싫어하면 어쩌자는 말이냐, 내 자신아. 세월은 흐르는데 내가 바라는 건 저만치 있고 뭔가 방향을 잘 못 맞춰도 한참을 잘 못 맞췄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아까 들은 무례한 말에 웃으면서 소주잔을 비우는 내 처지가 수많은 사람의 군상과 닮아있고, 한참 뒤에야 '그래, 원래 인생이 평범한 거야. 어쩔래? 평범하지 않다고? 평범하지 않게 살려면 한참 방향을 잘 못 잡았는데? 이미 늦었는데?'라며 식어버린 마음에 자멸하진 않을까 후회스럽진 않을까 궁시렁 댈까봐 그 또한 많은 사람의 최후와 닮아가고 있다.
서운해하지 말자. 억울해하지 말자. 울지 말자. 고독해도 고독한 척 하지 말자. 그러지 말자. 눈시울이 붉어지면 세면대 앞에 가서 찬 물을 눈에 대고 비비자.
소주 한잔 참 징하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즐기는 의미에서 '회식'을 생각했다면, 이제는 이곳저곳에서 삶의 굴레에 찌든 우리네 모습에서 '회식'이 보여 그 맛이 더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