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과 반대편에 위치한 산까지 큰 마음먹고 갔는데...
일주일 전부터 가기로 계획하였으면서 역시 나란 사람은 전날이 되어서야 본격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어디서 간식거리를 살지, 무슨 교통편을 이용할 건지, 날씨가 어떤지, 무엇을 챙길지..
일에 대한 멀티태스킹은 형편없는데, 닥쳐야만 준비하는 나 자신을 바라보니 멀티태스킹이 가능해졌습니다. '시간이 얼마 없으니 얼른 준비하자' '어이구.. 그러게 시간 있을 때 미리미리 준비 좀 하지.. 매번 똑같아..'
등산 D-DAY 아침이 밝았습니다. 어설프게 준비한 배낭 하나를 메고 집을 나섰습니다. 동네 지하철을 타러 가는 길에서 배낭이 자꾸 집을 바라보고 걱정합니다. '빠진 건 없겠지?'
일정이 없는 날에는 집돌이로 있기에 이날의 여정은 나름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본 도쿄와 대한민국 서울 시차도 없는데, 집에서 1시간 반경을 넘은 곳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곳이 어디일까요? 네, 저는 등산하러 가고 있습니다. 아침 하늘을 보며 외출하여 점심 경 등산 출발점에 도착하였습니다. '역시나 멀구나. 등산을 시작해볼까?'
잠깐. 저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처음 저의 글을 보시는 분들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서 오세요.
저는 대한민국 서울에 사는 30대 직장인입니다. 먹는 것은 대부분 좋아하고요, 취미가 많지 않지만 글 쓰는 것을 좋아합니다. 취미만큼이나 자주 거론되는 대화의 주제인 운동은 저질체력에 몸치라고 말쓰드릴 수 있겠습니다. 2020년 코로나19 시국이 시작되면서, 체력 유지를 위해 그나마 하던 운동까지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혼자 하는 운동은 쉽게 지루해하는 타입, 즉 두 명 이상 같이 하는 운동을 좋아합니다. 상황적인 요인으로 이조차 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레벨 1. 집돌이"에서 "레벨 10. 집돌이"로 성장하였습니다. 소개가 길었지만 요약하면 운동은 저와 거리가 먼 분야입니다.
집에만 있다가는, 뒤룩뒤룩 살만 쪄서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무서워서 이렇게 등산하러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 잘 올라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말아 주세요.
여하튼 다시 등린이의 등산 코스로 돌아와서. 마스크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은 상쾌하였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는 귀를 어루만졌습니다. 가끔 나무와 나무 사이로 들려오는 동물 소리는 자연의 대변인으로 마중 나왔습니다.
지난 2년간 나는 등린이. (음, 저도 압니다. 제가 생각해도 정말 오래 걸린 것 같습니다. 지금도 등린이로 보내고 있다는.. 쿨럭) 발바닥을 거쳐 밀려오는 조임이 종아리로 오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의외로 걸을만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자연이 선물하는 모든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나보다 2배 이상 큰 나무는 어느 세월에 저렇게 자라났는지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며 지나가는 등산객들의 대화 소리는 그리운 여행지의 소리처럼 반가울 수 있는지
여러 사람의 발길로 만들어진 등산로는 비포장도로이지만 험하지 않았습니다. 평일인지라 사람들이 적었고, 중간중간 휴식을 취하며 사진을 찍기에도 안전하였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당연한 사실이겠지만 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정상이 보였습니다. 사실 집돌이이자 동네 등린이 대표 자격으로 이 산을 방문한 사심이 있었습니다.
며칠 전 인터넷 서핑하고 있었습니다. 집돌이 생활에서 벗어나 1주일에 한 번이라도 나를 위해 외출하는 시간을 갖자는 의도에서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탁 트인 곳을 좋아해서 '전망 보기 좋은 장소'를 검색하고 있었던 겁니다.
사진작가의 전문가 솜씨를 거쳐 탄생한 사진인지 저의 마음을 사로잡는 사진이 있었습니다. 이번에 방문한 산의 정상에서 바라본 시내 전망이었고, 다른 곳보다 탁월한 전망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거다, 가자'
마음속 보관함에 저장한 이미지가 주는 감성이 컸던지라 출발 전부터 들떠 있었습니다. 인터넷으로 봤던 전망을 내 눈으로 담을 수 있다니. 집에서 거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2시간 30분 가량을 걸려 도착한 등산로 초입은 이방인을 격려하였습니다. 머지않아 인터넷 사진은 현실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 정상을 가기 전 마지막 계단을 올랐습니다. '드루와! 드루와! 나는 너를 만날 준비가 됐어!'
에고? 내가 잘못 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 잘못 본거지?
눈앞에 들어온 광경은 두 눈을 의심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먼 길을 찾아서 왔구만, 눈앞에 보이는 게 구름 잔뜩 낀 하늘이 전부라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니.. 실화냐? 이건 아니지!
그동안 잊고 지냈던 종아리와 허벅지의 피로감이 한 번에 몰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지하철 두 번 환승, 버스로 환승, 또 환승.. 인터넷 사진에 대한 기대만 품고 여기까지 왔는데 말이죠..
정상에 있는 나무 아래 걸터앉았습니다. 가방에서 물병을 꺼내 물을 한 모금 마셨습니다. 등 뒤로 땀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흙으로 먼지가 쌓인 흰 운동화는 초라하게 보였습니다. 30분가량 흘렀을까요? 등산객 5명이 지나가는 동안 잔뜩 구름 낀 하늘만 멍하니 바라봤습니다. '어쩔 수 없지.. 다음에 와야지'
엉덩이에 뭍은 먼지를 털고 일어서서 구름 낀 산 정상을 배회하였습니다. 50대로 보이는 아저씨 두 분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얼마나 대화에 집중하시는지 반대 방향으로 지나가는 저는 보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전망이 멋있다고?
-> 구름 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운치 있다고?
-> 허탈하기만 한데?!
날씨가 좋다고?
-> 정말 날씨가 좋았다면 지금 마음껏 전망을 즐기고 있겠지!
순간 머리 안이 번뜩였습니다. '그래, 어쩌면 이게 태도의 차이구나'
인터넷 사진만 보고 먼 길을 찾아온 저는 보이지 않는 전망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산(자연)은 모든 사람 앞에서 그저 제 몫을 다하고 있었을 뿐, 저보고 실망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짜증 내며 실망한 건 오로지 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 아저씨 말대로 나름 지금의 상황은 멋이 있었습니다. 실망감을 표현하느라 듣지 못하였던 새소리가 들렸습니다. 보이지 않는 전망에서 시선을 돌리니 보이지 않던 주변이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 여기까지 왔는데 조금만 더 즐기다 갈까?'
주변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뉘엿뉘엿 해가 저물고 있었습니다. 주변이 더욱 조용해졌습니다. 구름 사이로 일몰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완전하지 않지만 만족스러운 전망이 보였습니다. 산 정상에는 아무도 있지 않았습니다. 일몰 1시간 전부터 시작된다는 매직 아워(magic hour)는 오로지 나의 몫이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요?
빨간색과 회색이 섞인 색깔은 온데간데없이 깜깜한 어둠으로 변했습니다. 화장실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밖에 없었습니다. 산 위는 생각보다 추웠습니다. 공터에서 불어오는 바람처럼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오싹하였습니다. '아, 얼른 내려가야지'
막상 하산을 시작하려니 어디로 어떻게 올라왔는지 기억이 안 났습니다. 게다가 핸드폰 배터리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산이다 보니 자세한 하산 경로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물어볼 텐데, 지금에서야 다시 생각해보니 그 시간에 지나가는 사람이 없는 것이 당연하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에너지 비축을 위한 식량, 체온 유지를 위한 옷들은 있을 리 만무하였습니다. 동네 야산이 아니다 보니 가로등 자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50대 아저씨가 말한 운치 있는 산은 어디 간 거냐..
가방을 뒤적였습니다. '제발 무엇 하나라도 나와라'라는 생각으로 손을 뻗혔습니다.
바로 그 순간, 새끼손가락 끝에 닿는 작은 물건. 1500원짜리 LED 램프였습니다. 크기는 손바닥보다 작아서 원래라면 머리 쪽에 장착하는 물건이었습니다. '지금 이것밖에 믿을 게 없구나'
계단이라고 생각되는 길로 발을 내디뎠습니다. 물론 확신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닙니다. '계단이니까 내려가는 길이겠지'라는 생각했을 뿐이었습니다. 종종걸음으로 내딛는 발걸음 앞으로 10cm 정도만 보이는 상황이 연출되니 후회되었습니다. '아.. 조금이라도 불빛이 있고, 사람이 있을 때 내려올걸...'
밤하늘을 가릴 것만 같은 나무 사이로 걸었습니다. 지면에 닿은 발바닥 감각에만 의지했습니다. 아니, 그렇게라도 하고 싶었습니다.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였습니다. 이상한 비석 같은 게 어둠 속에서 실루엣을 드러내기도 하고, 램프 불빛을 쫓아온 손바닥 만한 벌레들이 깜짝 등장하였습니다. 벤치와 같은 용도로 보이는 을씨년스러운 나무토막이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 3월인데 벌써 납량특집이냐고...'
방전된 핸드폰 배터리는 더 이상 저의 손길을 기다려주지 않고 먼저 집으로 갔습니다. 위험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길을 다시 되돌아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나무를 사이에 둔 갈림길에서는 어디로 가야 할지 망설이기도 하였습니다. 어디로 가나 위험해 보이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나.
1분 1초 시곗바늘이 크게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요? 눈앞에서 또 다른 불빛이 나타났습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집에 가고 싶은 저와 반대로, 야간 등산하는 분들의 램프 불빛이었습니다. 얼마나 반갑던지.. 그리고 지금 향하는 방향대로 내려가면 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안도감에.. 숨을 쉴 수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짧지 않은 시간이 흘러서 산 아래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몇 시간 전 들어섰던 등산로 초입은 아니지만 어찌 되었든 내려왔습니다. 다행히 다친 곳 없이 내려왔습니다. 그냥 그 사실에 감사하였습니다.
오늘 하루 동안 감정이 롤러코스터를 탔습니다. 인터넷 사진을 보겠다는 마음에 기대감으로 집 대문을 나섰고, 2시간 30분 이상 걸린 정상에서 자연의 불허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였습니다. 등산객 아저씨로부터 '태도'를 전환할 수 있었고, 완전하지 않지만 나의 만족감을 찾았습니다. 어둠밖에 없는 상황에서 공포를 느꼈고, 사고가 마비되는 패닉을 경험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산하려는 나와 반대로 등산하는 사람을 보고 안도감을 느꼈고, 산 아래 도착해서는 '살았다'라는 감사함을 갖게 되었습니다.
정말이지, 매일 감정의 기복이 많지 않은 30대 일상에서는 버라이어티한 하루였습니다. 그날의 기억은 집으로 향하는 또 다른 2시간 30분 동안 소화되어 '하나의 경험'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종아리에만 텐션 있는 게 아닌, 온몸으로 텐션을 느낀 등산이었습니다. 자연 앞에서 겸손해야 함을 배운 등산 기록이었습니다.
조만간 야간산행을 준비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30대 등린이 등산 경험일지
1. 잘 모르는 길은 조사하자. 등산 좋다. 하지만 생존 루트도 찾아야 한다.
2. 배터리로 작동하는 핸드폰도 자연 앞에서 한낯 기기에 불과하다. 배터리 없으면 고철덩어리다.
3. 자연의 본능은 변덕스러움일지도 모른다. 그게 그들에게는 일상일지도 모르겠다.
4. 밤에 보는 산은 낮과 다르다. 정말 다르다.
5. 작다고 무시하지 말자. 1500원짜리 램프로 무사히 산을 내려올 수 있었다.
6. 누구나 실망할 수 있다. 실망해도 바뀐 건 없다. 다만, 태도는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