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미련 회자정리 시간의 결대로

by 스톤처럼

보통의 날이다. 눈을 떴다. 거울 앞에 섰다. 눈가 주름이 보인다. 아직 흰 머리는 나지 않았다. 문득 오늘은 무언가 보낼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한 달마다 찾아오는 머리 자르는 날. 이번에는 지난 달보다 무려 5일이나 늦었다. 간단히 옷을 입고 시간의 결이 느껴지는 발걸음으로 살갗을 맴도는 차가운 공기를 가로지른다. 개인시간으로 설정된 핸드폰에서 모르는 번호 전화가 울린다. 받아야 할 것 같다. 받았다. 머리를 담당해주는 선생님께서 버스 파업으로 예약시간보다 늦을 것 같다며 연신 사과한다. 상황이 주는 잘못에 누군가에게 감정의 우위에 서고 싶지 않다. 어떤 책에서 자존이란 그런 게 아니라 한다. 여유가 있다. 예약시간보다 1시간 더 미뤄보자고 역제안한다. 안전하게 오시길 바라며 만남을 연기한다.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시간의 축적이 있고 결이 살아있는 곳이다. 이 곳 골목길 골목길 다 누비고 다녔다고 자만했는데 보통의 날인 오늘에 골목길 끝에서 불어오는 아침 공기는 익숙하지 않다. 걷는다. 한 걸음씩. 하루에 두 번씩 확성기로 야채 채소 판매하는 트럭상 아저씨에게 눈인사한다. 한 차례 아침을 치르고 있는 이 동네에서 유일하게 큰 소리를 치고 있는 확성기 목소리, 옛 감성과 사람 사는 냄새를 염화칼슘처럼 곳곳에 뿌린다.


을지로입구역 인근 어딘가로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 청바지 차림에 언제 샀는지 기억도 안 나는 오래된 스웨터, 패딩 하나 걸치고 직장인들 사이로 숨어든다. 5개월 전 그만둔 선배가 그랬다. 누군가 출근하고 있을 때 나는 출근하지 않고 여유를 느끼고 있으면 마치 승자가 된 것 마냥 기분이 좋다고. 글쎄, 그런 승리감에는 관심이 없지만 배도 좀 고프고 커피도 마시고 싶다. 스카이콩콩처럼 분주한 직장인 사이 숨었다 드러냈다 다시 숨었다 반복하며 평소 유심히 지켜보던 카페 안으로 쑥 들어간다.


빵과 커피 모닝세트, 해피아워 5천원에 먹을 수 있다니. 오늘은 아침부터 운이 제법 좋다. 출근하는 날이면 누리지 못 하는 이 호사에 긴장도 풀어본다. 손끝에 고드름이 맺혔나, 차가운 손끝에 전해오는 커피 따뜻함이 모닥불 앞에 앉아있는 기분이 든다.


변경된 예약시간까지 책도 읽고, 사색에도 잠겨본다. 빵가루가 떨어져있지만 그래도 깔끔하게 먹었다. 혼자 있을 때는 잘 몰랐는데 이렇게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여유'를 느껴보니 내가 놓아주어야 하는 게 뭔지가 보인다. 아니, 놓아주는 게 아니라 어쩌면 그대로 내버려둔다고 할까. 오늘 무언가 보낼 것 같다는 예감이 확신이 드는 순간이다.


찬 바람에 흔들리는 등불처럼 빠르게 지난 날들이 흘러지나간다. 오래 걸렸고, 한참이나, 그리고 방금까지도 과거를 놓아주지 못 한 채 그 과거에서 어찌되었든 잔존하고자 부단히 노력해왔다. 과거에 미련이 남은 누군가를 볼 순 없지만 생각 정리를 조금이라도 해본다고 밤 산책, 또 후회되는 무언가 때문에 갈망하면서 애써 피하려는 모순. 나는 지금을 살고 있지만 여전히 나는 과거를 살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때의 내가 어때서. 지금 보면 그 때의 나 또한 그 때는 최선이었던 걸. 못내 놓아주지 못 하는 과거에서 참 긴 시간을 홀로 보냈다. 타인을 향한 증오가 있는 줄 알았건만, 사실은 최선을 다 하지 못 한 것 같은 나에 대한 증오였거늘. 그런 나를 본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져 창피하다고 생각했건만, 사실 나도 내 삶을 살기 바쁜데 다른 사람들이야 나에 대해서 그리 심오하게 생각했을까. 그저 그 사람이 있었다 정도지. 만나서 모른 척 하면 그만, 아는 척 같이 해주면 땡큐. 인연이거늘, 나 혼자 인연이라는 실타래를 놓지 못 하고 있었네.


아마도 빵 조각을 먹으며 저 멀리 4인석 옆 2인석 자리에 앉아있던 '과거의 나'가 보였나보다. 그대로 두니 멀어지네. 과거의 나 또한 더 이상 다가오지 않고 그대로 서있네. 이제야 10년 전 과거를 잡지 않는구나. 3-4년 전 과거는 언제쯤 잡지 않을 수 있을까. 시간이 필요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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