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방일지 ep. 마라톤 조깅 발톱

- 42.195 km 마라톤 풀코스 그 후에 남은 유물들

by 스톤처럼

정수리부터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 물방울이 샤워실 바닥으로 흘러가도록 길이 되어주고. 물이 떨어지는 가운데 서서 물이 시작되는 지점을 잊어버린 시간. 42.195km 마라톤 풀코스 완주 후 호텔 샤워실에 서 있었습니다. 유독 더웠던 그날 옷으로 가린 부분 외 다른 신체 부분을 까맣게 태웠습니다.


물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있으니 알게 되었죠. 왼쪽 발가락 발톱 몇 개가 새까맣게 피멍이 들었다는 사실. 그래서 미안해지는 그 마음. 그래도 수고했다는 감정. 평소와 다르게 바란 발톱을 바라보고 서 있었습니다.


발톱 안에서 피가 터지고 고여서 피딱지가 진 건지 바깥으로 피가 흘러나오지 않는 묘함. 그런 발톱을 조깅 발톱이라고 부르더군요. 처음 마주하면 당황하지만 사실 많은 마라토너에게 흔한 증상이라는 것. 42.195km 뛰고 들어온 사람이 몇 번의 클릭으로 알아낸 인터넷 정보입니다. 마라톤 완주 후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쉬었습니다.


다음 날이 월요일이었습니다. 호텔에서 가까운 병원에 가서 발톱을 빼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그런 성급한 마음을 알고 계셨는지 시간을 가지고 기다리면 자연스레 빠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신 발톱이 흔들리지 않게 발가락 밴드를 붙여서 약 처방과 함께 돌아가라고 하셨죠. 그대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렇게 그 발톱은 점점 잊혀 갔습니다. 주기적으로 밴드를 바꿔서 붙이는 게 고작이었죠. 마라톤 완주 메달이 벽 한가운데를 장식한 지 1달 가까이 지났을 때 다시 발톱이 생각나기 시작했습니다.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10월 중순, 그러니까 마라톤 당일보다 더 짙어진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번에는 집에서 가까운 병원을 갔습니다. 오늘 이 발톱을 빼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10월 중순과 평행이론 같은 대화가 오고 갔습니다. 또 다른 의사 선생님도 같은 말을 하셨습니다. 시간을 가지고 기다리면 자연스레 빠지든 치료가 될 거라고. 혼자서 내심 기대를 했나 봅니다. 이 발톱이 빠지기를. 오늘은 이 발톱을 뺄 수 있기를.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시 보름이 흘렀습니다. 얼마 전이죠. 아침 샤워 후 머리를 말리는데 그 발톱이 보였습니다. 마라톤 당일에는 발톱 1개 정도만 까만 줄 알았더니 자세히 보니 4개 정도가 그렇더라고요. 근데 발톱들을 빼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나의 성급함과는 거리가 멀었어요. 발톱들을 포옹하고 같이 가겠다. 내 훈장 같은 발톱들.


최근 밤샘 작업들이 많았어요. 새벽 3~5시 사이에 눈을 붙이는 게 일상이었습니다. 맡은 일은 약속한 일은 다 해내겠다는 신념. 그 하나로 움직이다가.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왜 이러고 있지?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이 멈췄습니다. 많은 것을 해왔지만 할 일도 많이 남아 있었죠.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어요. 알면서도 멈추는 것 지독하더라고요. 그동안 안주 삼아서 열심히 만지던 그 물체가 보였습니다. 마라톤 완주 메달. 메달 뒤에 적힌 그날의 연/월/일 일자와 42.195km.


느리지만 열심히 달렸습니다. 많은 사람이 지나쳤지만 그래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길 위에서 누군가가 오늘의 마라톤 풀코스 주자들은 달리기 싫겠다는 목소리가 들리기도 했죠. 그럼에도 보이지 않는 결승선을 위해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기억납니다. 앞에서 달리던 분이 코스가 아닌 길로 들어서고, 다시는 그 코스로 돌아오지 않았던 모습을. 음료는 선두주자들로 인해 소진되고. 뜨거운 아스팔트는 내 의지를 시험하고 유혹하고 내팽개치기 위해서 발악을 하는 것을. 귓속을 맴도는 그 소리. '그럴 줄 알았어' '힘들면 포기해' '괜찮아 원래 그래'


뒤처졌다는 생각에 울컥. 이렇게 멀리까지 와서 아무것도 못 하고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또 울컥. 프로선수들처럼 나는 달리지 못한다. 포기할까? 지금 여기서 옆길로 빠져서 호텔로 돌아가도 아무도 모를 걸? 그래.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자. 내 페이스에 맞추고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가자.


여러 사람이 달리는 마라톤 초반에는 몰랐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사람 간 거리가 멀어졌습니다. 그제야 보였습니다. 길 위에서 마라토너를 바라보는 사람들 시선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여기서부터 나 혼자서 그 무게를 견딜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다시 현실로 돌아와. 새벽 3시를 조금 넘긴 시각. 저는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른손에는 어느새 마라톤 완주 메달이 들려 있었죠. 마라톤 풀코스에서 힘이 들기 시작한 순간들이 이 메달에 남아 있었습니다. 웃으며 달렸던 초반보다, 코스 중간의 기억들이 힘듬과 함께 덕지덕지 붙어 있었죠. 그럼에도 저는 완주를 해낸 것입니다. 길고 길었던 그 길을 지나서 말이죠.


그 순간 마음에서 울림이 있었습니다. 나는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한 사람이다. 포기하지 않은 사람이다. 여전히 나는 사막처럼 뜨거운 아스팔트에서 비교적 호리호리한 체형으로 달리고 있다. 당시에는 생지옥 같았지만 지금은 언젠가 결승선을 넘어 웃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마라토너이다.


새벽의 울림과 함께 일을 다시 잡았던 그날의 새벽이 지나고 아침이 왔을 때. 그 발톱의 상처를 다시 보게 된 것입니다. 밉지 않았고 빠지지 않고 나의 울림을 계속해서 유지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마라톤 끝난 직후 빠지지 않아 줘서 참 고맙다.


그 이후 병원에는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라톤 풀코스 완주 메달은 잘 보이는 자리로 옮겼습니다. 그게 42.195km 마라톤을 끝까지 해낸 사람으로서, 힘듬을 이겨낸 자신을 위한 처방전이었죠.


오늘 아침에도 여전히 왼쪽 발톱 4개는 까맣습니다. 하루 시작과 함께 하루를 계획하는 책상에는 마라톤 완주 메달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마라톤 코스 위에서 울컥만 두 번한 찌질함의 역사도 있어요. 그런데 흑역사가 아니라 무슨 일이든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고 있습니다.


그 다음은 무엇일까요? 앞으로 어떤 고난이 찾아올까요? 고난 다음에는 무엇을 얻을까요? 돈? 명예? 자존감? 추억? 글쎄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다가오는 밤샘 작업에서 다시 메달을 만지고 박카스 같은 자양강제적 힘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은 알겠습니다. 하루 16시간씩 일을 하더라도, 마라톤 추억팔이 5분의 시간이 더 크게 느껴질 것 같습니다. 어벤저스 캡틴 아메리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I can do this all day!"


"온종일도 할 수 있어!"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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