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쓰레기..통.... 비워도 될까..요?

by 스톤처럼

수명 다한 조명 아래 두 책상이 나란히 붙어있습니다. 책상 구석에는 오래된 참고서들이 꽂혀 있습니다.


그 옆에는 차분히 정리되어 있는 펜과 기록 일지처럼 보이는 종이들. 의자 옆에는 선반들이 있는데 그 안에는 시꺼먼 먼지가 많이 묻은 유니폼이 있습니다.


먼지와 함께 공존하는, 간식처럼 보이는 컵라면 몇 개가 보입니다. 유통기한은 넉넉한 것으로 보아 오래된 라면은 아닌 것 같습니다.


검은색 야구모자 아래 섬광을 뿜어내는 눈빛이 어둠을 가로질러 내 뒤통수를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제야 알았죠. 내가 지금 나의 사수라고 부를 수 있는 A라는 사람과 3평 남짓한 휴게실에 함께 있다는 사실을 말이죠.


형식적인 양식과 의례적인 인수인계를 시작합니다. 업무 설명에 5분 이상 할애하지 않았습니다.


낡은 티셔츠를 보고 점심은 먹고 왔는지 묻습니다.

그 이상 물었을 뿐,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했는지 어떻게 이 일을 하게 되었는지 묻지 않습니다.

과거는 지하철 2호선 강남역에서 내리지 않고 외선순환 방향으로 홀로 지나갔나 봅니다.


과거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한 A의 말씨에서 따뜻한 코코아 같이 긴장이 녹아내리는 것 같습니다.

내심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 길지 않은 시간, 업무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고 유니폼으로 갈아입으라 합니다.


내 체형과 비슷해보이는 유니폼 하나를 잡습니다. 얼굴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이 이 유니폼을 입고, 남기고, 떠났을 거라 추측해 봤습니다.


검정색 계열의 유니폼은 '옷'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알 수 있겠습니다. 저렴한 천으로 만든, 망가져도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는 무관심이 전해집니다.


휴게실 경계를 넘어 극적인 대조를 이룹니다.

먼지 한 올, 구석 곳곳까지 보일 만큼 환한 빛이 복도와 사무실을 은은히 밝히고 있습니다.

휴게실은, 언제 교체했는지도 모를 정도로 낡은 조명에 의지해 선명함이란 없던 공간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복도를 오가고 있습니다. A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따라오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움직여야 하는 동선을 소개합니다. 어느 한 곳에서 '비효율' '게으름'이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람을 배려하는 것 같으면서 동시에 냉혹히 버릴 수 있다는 듯이, 공간은 사람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10대 시절 친구 따라 사설 독서실이란 곳을 따라가보면 칸막이 책상이 있었습니다.

오로지 공부 하나에 집중하도록 만들어진 환경에서 '입시'라는 천하무술대회에서 겨루기 위해 수많은 학생이 경쟁하였습니다.


다섯 손가락을 부채꼴처럼 펼쳐서 손바닥부터 나무책상을 만지고 있으면 부드러운 감촉이 말초신경에 전해집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만지다 익숙하지 않은 감촉이 전해지는 순간, 개구리가 손을 오므리듯이 주먹을 쥐곤 했습니다.


칸막이 너머 복도까지 펼쳐진 칸막이 책상에서 사춘기를 보낸 사람은, 누군가의 핑거스냅에 화들짝 놀랍니다.


칸막이 같은 사무실에 펼쳐진 복도에서 정신을 놓치지 말라는 A의 핑거스냅이었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알겠다는 눈치로 보다 빠른 속도로 이곳저곳 다니기 시작합니다.


커피머신 안을 소독합니다. 누군가 뱉은 가래에 융화되지 않은 커피찌꺼기를 치웁니다.

라면 한 젓가락이 보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라면이 보여 순간 동공이 커졌지만 두 번째 핑거스냅이 보입니다.

누군가 던져 버리고 간 라면 면발에 정신을 잃지 말라는, 역시 이번에도 A 입니다.


껌이 다닥다닥 붙은 대형 쓰레기통을 손이 부어오르듯이 닦아냅니다. 족히 5kg 넘는 쓰레기를 한데 분리수거 합니다.


모든 걸 빨아들이는 대형 검은색 쓰레기 봉투에서 생리대가 보입니다. 스타벅스 플라스틱 테이크아웃 커피잔에 '스타벅스 로고'가 안쓰럽게 웃고 있습니다.


갈색 계열 커피 국물이 그 웃는 얼굴을 타고 흘러내립니다. 커피물 담긴 상태로 쓰레기통에 던져진 것입니다.


두 번째 쓰레기통을 정리하려 허리를 100도 가까이 숙이고 있을 때 뒤에서 들린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휙 들었습니다.


마치 투명인간이 된 것 같습니다. 존재감이 없습니다. 물 비스무리한 것을 맞은 것도 같은데, 누군가 복도를 지나며 음료병을 가지고 쓰레기통에 3점슛을 쏜 것입니다.


AC....


A가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있습니다.


주둥이와 엉덩이가 반복적으로 3번에서 5번 정도 바닥을 치더니 이내 잠잠해 집니다. 액체를 비우고 쓰레기통에 담습니다.


공용공간은 커뮤니티공간입니다. 이 공간을 치우고나니 A가 어디서 밀대를 가져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잠시 닦을게요.


커뮤니티에서 이번 주말에 무엇을 하며 놀지 화려한 휴일 계획을 세우는 정장핏의 사람들의 구두발 앞에서 밀대의 움직임에 대한 신호등 역할을 해줍니다.


공용공간 옆 엘리베이터랑 이어지는 유리문이 활짝 열립니다. 한 손에는 커피를 들고 사원증을 두르고, 웃고 떠들며 구두소리를 내는 남녀 2쌍 무리가 들어옵니다.


< 이삭 줍는 여인들 > 처럼 '쓰레기'와 '먼지'를 줍고 있는 어수룩한 두 사람, 구두에 묻으면 안 되는 구정물처럼 벌레 보듯 피해 복도 가장자리를 이용해 지나갑니다.


멀어지는 무리를 0.5초 보고 다시 내 일을 합니다.


시간이 얼마 없어요. 서두르세요.


A는 창고로 데려가더니 손에는 조금만 마찰이 있어도 찢어질 것 같은 니트릴 장갑을 건넵니다. 그리고 구석에 있는 100cm 넘는 검은 쓰레기봉투 또한 줍니다.


자, 이제는 동선이 중요해요.


아리쏭한 말을 듣고 A의 날개뼈 사이 등 정중앙 포인트라 여겨지는 곳만 보며, 재촉하는 A를 따라갑니다.

미로 같은 복도를 지나 어느 사무실 앞에 섭니다.


똑.똑.똑.


대답이 없습니다. 안에서 근무하는 사람에게 여전히 존재감 없는 것처럼 조용히 다가가 책상 아래 있는 쓰레기통에서 쓰레기를 쓰레기봉투에 담습니다.


똑.똑.똑.


다음 사무실에서는 20대처럼 보이는 청년들이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리고 아무 말도 없이 책상 옆 쓰레기통을 비웁니다.


사무실에 있는 모든 쓰레기통을 비웁니다.


똑.똑.똑.


그 다음 사무실, A는 로봇처럼 움직입니다. 책상과 책상 사이, 사무실 안에서 움직이는 최소한의 동선을 가지고 AI 빰치는 움직임으로 비워냅니다.


10개 회사 사무실을 돌았을 무렵, 검은 쓰레기봉투는 이미 3분의 2 이상 가득차 있었습니다.


화물용 엘리베이터 앞.


올라가는 버튼을 누릅니다. A는 역시 말이 없습니다. 왼쪽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더니 인스타그램 알림이 있는지 확인합니다.


무거운 중음을 내며 우리가 있는 층에 엘리베이터가 멈췄습니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4명이 있었습니다.


배달의민족 마크가 달린 가방을 메고 계신 배달 라이더분, xx퀵이라 적힌 헬멧을 쓰고 계신 50대 정도로 보이는 아저씨, 빌딩 보안요원처럼 보이는 '스미스 요원' (영화 매트릭스 시리즈 메인 빌런), 다른 사무실로 올라가는 듯한 직장인.


배달 라이더분은 입구쪽에 서서 퀵배송 아저씨와 함께, 무언의 '자리'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더 빨리 내릴 수 있는지 경쟁하는 것 같습니다.


직장인분은 이 빌딩에서 존재감 없는 사람들을 피해 구석진 자리에 몸을 구겨넣고 핸드폰만 보고 있습니다.


스미스 요원은 대형 쓰레기 봉투를 들고 있는 두 사람을 훑어봅니다. 위험인물인지 아닌지 판별하는 듯한 눈빛이 보입니다.


엘리베이터 도착층 안내 음성이 묵중하지만 공허한 공기를 가로지르고 있습니다.


여기서 내려요.


A가 배달 라이더와 퀵배송 아저씨에게 목례를 하고, 엘리베이터 탈출에 가장 좋은 자리를 선점합니다.


똑.똑.똑.


엘리베이터 바로 앞에 보이는 사무실에 들어갑니다. 쓰레기통을 향한 A의 손짓이 잠시 멈춥니다.

로봇에 고장나지 않은이상 이상한 무언가를 발견해 주저하는 게 분명합니다.


A의 오른쪽 어깨 너머로 그 쓰레기통을 바라봅니다. 양념치킨과 후라이드치킨이 뒤엉켜 난리 부르스를 추고 있습니다.


쓰레기통은 치킨소스로 범벅이 되고, 사무실에 사람은 없습니다.


AC.. 이렇게 버리지 말아달라고 말해야 하나. 너무들 하네.


능숙한 손놀림으로 얼마 걸리지 않아 후딱 치웁니다. 더러운 쓰레기통에 미간을 찌푸렸지만 A의 '프로' 손놀림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몇 개의 사무실을 돌았을까. 아니, 이 건물이 우리 주위를 빙빙 자동으로 회전하고 있는 건 아닐까.


무엇을 했는지 어떻게 했는지 어디에 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마지막 사무실을 남겨두고 등만 보이던 A가 돌아섭니다.


'스톤'씨가 들어가서 한번 해보세요. 실습입니다.

(* 스톤은 필자의 별명입니다.)


똑.똑....똑.똑.


10명이 넘게 근무하고 있는 사무실에 낡은 운동화를 들이밉니다. 그 많은 인원이 일제히 쳐다봅니다.


목례는 적당히(?) 5번 정도.. 잰 걸음으로 첫 번째 쓰레기통 앞에 섭니다. 비웁니다.

두 번째 쓰레기통을 찾습니다.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책상과 책상 사이로 쓰레기통을 찾아 다닙니다.


책상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병풍처럼 느껴지길 바라며, 그 누구도 내가 누군지 알아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쓰레기통을 찾아 누빕니다.


책장 옆에 작은 쓰레기통이 보입니다. 안도의 한숨을 쉬고 비웁니다.

다음 쓰레기통을 찾습니다. A가 3개가 있다고 했으니 이번이 마지막 쓰레기통입니다.


이번에도 잰걸음입니다.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왼쪽 볼따구를 타고 땀 한 방울이 흐릅니다. 척추뼈가 시작되는 목뼈 부근에서 땀이 나는 게 느껴집니다.


어쩌지. 어째. 빨리 해야 하는데..


지뢰찾기 하듯이 머릿속에서 쓰레기통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살펴본 책상은 하나씩 지워갑니다.


파트장 직급으로 보이는 사람 (다른 사람과 달리 별도의 분리된 책상에 있었음) 종아리 부근에 오늘의 마지막 쓰레기통이 보입니다.


분명 저 사람도 내가 쓰레기통을 찾는지 알텐데 왜 가만히 있지?


파트장 책상에 다가가보니 내 나이 또래로 보이는 청년이 모니터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저.......... 쓰레기..통.... 비워도 될까..요....?


왼쪽 가슴 부위에 있는 파견회사 로고를 슬쩍 보곤 오른발로 쓰레기통을 대충 밀어줍니다.


오늘 하루종일 땅을 바라보고 움직였습니다. 왼쪽 무릎을 접고 쪼그려앉아 분리수거되지 않는 쓰레기통 쓰레기를 담습니다.


관자놀이까지 홍당무가 된 얼굴로 눈도 못 쳐다보고 고개를 꾸벅이고 책상 아래 쓰레기통 원래 위치에 가져다 둡니다.


검은 니트릴 장갑이 누군가의 사무용품에 닿지 않도록 손은 무릎보다 조금 위쪽에 두고, 허리를 숙인 채 그 사무실을 나왔습니다.


사무실 입구가 보이는 곳에서 A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괜찮아요?


대답은 못 하고 고개만 연신 끄덕입니다. A 눈 또한 마주치지 못 하겠습니다.


더 이상의 오지랖 넓은 안부는 없습니다. 어쩌면 A는 내가 무슨 기분인지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다시 A를 따라 일과를 마감하는 업무를 처리하고 어둠의 휴게실로 같이 왔습니다.


유니폼보다 낡은 옷으로 갈아입은 후에야 A가 입을 엽니다.


오늘은 더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내일 나오지 않아도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하지만 제가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요. 내일 나오든 안 나오든 이 말은 꼭 간직하셨으면 좋겠어요.


우리도 똑같은 사람이에요.


10분 뒤 강남역 2번 출구, 여전히 사람들은 웃고 떠듭니다. 밤의 강남은 환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방금 내가 지나온 강남대로, 공감능력 없는 강남 빌딩은 참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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