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파호수 밤길에서 마주한 나의 민낯
군산에 온 지 며칠째 똑같은 패턴이 반복되고 있었다. 아침엔 군산 곳곳을 걷고 점심 이후엔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일상. 해가 질 무렵이 되자 몸이 근질거리기 시작했다. 문득 은파호수의 야경이 떠올랐다. 곧바로 동생에게 함께 걸을 것을 제안했고 우리는 무더운 밤공기를 가르며 집 밖으로 나섰다.
은파호수
해가 졌지만 무더운 날씨는 변함없었고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날 정도로 굉장히 습한 밤이었다. 은파호수엔 무더운 밤이지만 가족 혹은 연인들이 아름다운 야경을 보기 위해 북적였고 그 분위기에 같이 녹아들기 위해 은파호수 입구로 들어섰다.
은파호수 입구에 들어서자 화려한 조명들이 우리를 맞았다. 어릴 적 외할머니 댁에 올 때마다 찾던 이곳은 그때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작은 놀이동산과 오리배 대신 세련된 산책로와 조명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은파호수 초입부터 화려한 조명을 머금은 길들이 호수안쪽으로 안내해 주었다. 형형색색 빛나는 길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서면 호수를 가로지르는 작은 다리와 넓은 광장이 나온다. 광장에선 빛나는 장난감을 든 아이들의 눈빛 그 모습을 바라보는 부모들의 미소. 시간이 흘러도 이곳은 여전히 누군가의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주고 있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은파호수의 낭만은 단순히 화려한 조명으로만 채워지는 것이 아닌 이런 작고 소중한 추억들이 쌓였기에 값진 게 아닐까 생각한다.
오늘은 다리를 가로지르지 않고 호수를 한 바퀴 도는 긴 산책로를 택했다. 아직 갈 길이 멀었지만 동생과의 대화가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어줄 거라 생각했다.
바람을 타고 전해오는 한여름밤의 냄새. 별빛 하나 보이지 않는 어둠이 짙게 깔린 길을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우리의 대화도 깊어졌고 어느 순간 예상치 못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사람의 말은 전하는 사람과 그걸 듣는 사람이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있다. 사소한 오해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동생의 장난스러운 말 한마디가 내게는 다르게 들렸고 나는 순간적으로 화를 냈다. 동생 역시 자신의 의도와 다르게 받아들인 나를 이해하지 못해 더 큰 목소리를 냈다. 다행히 우리는 예전과 달리 감정을 추스르는 법을 배웠다. 오해를 풀고 나니 다툼은 금세 끝났지만 그 과정에서 나온 과거 이야기들이 내 마음에 깊이 박혔다.
가난한 대학생이던 나와 일찍 경제적 여유를 누린 동생. 우리의 20대는 정말 달랐다. 나는 항상 가성비를 따졌고 불필요한 지출을 경계했다. 반면 동생은 계산하지 않고 내게 필요한 것들을 사주곤 했다. 비싼 식사도, 갖고 싶어 하는 물건도. 그런데 나는 그 호의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내가 똑같이 해줄 수 없다'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다. 고마움보다는 부담감이 컸고 때로는 거절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의 나는 '공정함'이라는 이름으로 가족의 마음까지 계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동생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계산적이었는지 그 때문에 동생이 얼마나 서운했을지를. 진심으로 사과하며 다짐했다.
'피가 섞인 가족에게만큼은 계산적이지 말자'
20대의 나는 모든 행동에 나름의 정당성을 부여했다. 가난했으니까, 여유가 없었으니까, 현실적이어야 했으니까.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 정당성들이 하나씩 의문부호로 바뀌고 있다. 은파호수의 어둠 속에서 마주한 나의 민낯은 부끄러웠지만 동시에 소중한 깨달음이었다. 내일 해가 뜰 때는 조금 더 나은 형이 조금 더 따뜻한 가족이 될 수 있도록. 그 다짐을 품고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