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1일
그날이 왔다.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시원섭섭한 날. 아침에 친구네 집에서 눈을 뜨며 벌써 이곳을 그리워할 것 같단 생각을 했다.
아침으론 갓 구운 스콘에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셨다. 전날 친구랑 테스코에서 사 온 버터스콘을 살짝 데웠다. 여기에 클로티드 크림과 체리 잼을 듬뿍 얹어 천천히 먹었다. 버터스콘은 살짝만 데워도 풍미가 엄청나다. 마트 빵이 어찌 건강에 좋겠냐마는, 맛으로는 런던의 여느 카페 못지않다.
후식 같은 본식을 먹고, 진짜 후식으로는 커피를 마셨다. 새로 배송 온 네스프레소 캡슐이 있다며 친구가 머신으로 내려줬다. '써니 아몬드 바닐라(Sunny Almond Vanilla)'라는 여름 한정으로 나온 캡슐인데, 고소하고 단향이 나서 신기했다. 한국에도 있던데, 내가 머신이 없네...
영국에서의 마지막 식사는 한식으로 장식했다. 메뉴는 두부 유부초밥과 들깨 된장찌개. 어머님이 직접 담그셨다는 김치까지. 한국에서의 내 평소 식단보다 훨씬 한식답다.
친구가 영혼까지 수분을 짜낸 두부에 오트밀밥을 섞어 유부를 채웠다. 이번에 친구한테 지어준 별명이 있는데, '꼼꼼한 큰손'이라고. 서두르지 않고 꼼꼼히 요리를 하는데, 완성된 걸 보면 접시에 한가득이다. 그리고 자꾸 '할 수 있다'며 더 먹으라고 한다.
말은 안 했어도 10일간 거슬리는 것도 있고, 귀찮을 때도 많았을 텐데 너무 고마웠다 친구야. 덕분에 영국에서 때론 여행자로, 때론 현지인으로 알차게 돌아다녔다. 흐린 날이 더 많았던 영국 여행이 네 덕에 찬란하고 따뜻하게 기억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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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먼 길 떠나볼까... 친구 집에서 히드로 공항으로 가려면, 우선 근교의 기차역(Bletchely)에서 런던 중앙의 기차역(Euston)으로 가서, 지하철을 한 번 갈아타고 터미널 4까지 이동하면 된다. 이렇게 가니 2시간 반 정도 걸렸다. 만원 지하철로 갈아탔을 땐 캐리어 버리고 싶었지만 잘 참았다...
히드로 공항(Heathrow Airport) 4 터미널에 도착했을 땐 이미 녹초가 되어 있었다. 게다가 날씨는 잔뜩 흐리고 비까지 부슬부슬 왔다. 런던아 정 떼려고 그러는 거면 실패다. 아무리 그래도 난 벌써 그립단 말이다.
대한항공 KE908편은 런던에서 인천까지, 약 12시간 10분이 걸리는 비행이다. 저녁 7시 반에 출발하는 스케줄이라 마음의 여유가 있어 좋았다.
3시간도 더 전에 도착했더니 대한항공 체크인 카운터는 한산했다. 순식간에 체크인을 마무리하고 출국장으로 향했다. 짐 검사에 자동 출국심사까지 15분도 안 되어 끝나버렸다...!
가볍게 면세점 구경이나 해볼까. 이번에 포트넘 앤 메이슨 가게를 따로 안 갔는데, 면세점에 대표 차와 비스킷들이 꽤 많다. 감자칩으로 유명한 워커스 제품들도 두세 개씩 묶어서 팔고 있다. 차나 간식류는 면세점 여기저기에 가게가 많아서, 미리 못 사도 공항에서 해결할 수 있다.
해러즈(Harrods) 백화점도 코너가 따로 있는데, 컵이나 가방 등의 소품부터 틴케이스에 든 초콜릿까지 아이템이 다양하다. 몇 년 전에 이곳에서 머그컵을 하나 사갔는데, 아직도 집에서 잘 쓰고 있다.
영국의 체인 카페인 프레타망제(Pret A Manger)와 코스타커피(Costa Coffee)도 지점이 크게 있다. 작년엔 코스타커피를 갔으니 이번엔 프레따망제에 자리 잡았다. 비행기에서 조금이라도 자고 싶어 커피 대신 페퍼민트 차를 주문했다.
그리고...
사실은 공항 오기 전, 런던에서 떠난 비행기가 사고 났다는 기사를 봤다. 출발지도 런던으로 같고, 항공기도 B777-300으로 같아서 보는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비행공포증을 애써 비행기는 사고 확률이 낮다는 통계적 사실로 잠재우고 있던 터라 갑자기 확 긴장감이 몰려왔다. 마음 아픈 소식에 대한 안타까움과 다가오는 비행에 대한 무서움 등이 엉켜 마음이 복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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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타러 가는 길, 빗줄기는 더 굵어졌다. 게이트에서 통로를 한참 걸어야 하길래 설마 버스를 타야 하나, 했더니 그건 아니었다. 결국 비 오는 날 비 한 방울 안 맞고 비행기에 올랐다.
대한항공 KE908 편의 항공 기종은 B777-300이고, 좌석 구조는 이코노미 기준 3-3-3이었다. 인천에서 바르셀로나로 갈 땐 비행기가 만석이었는데, 런던에서 인천으로 돌아가는 이 비행기는 빈자리가 꽤 있었다. 내 옆자리도 운 좋게 공석이었다.
타본 비행기 중에 제일 쾌적했다! 일단 좌석 간격이 사방으로 널널했다. 스크린도 완전 신형이라 좋았다. 어메니티라고 할 건 슬리퍼와 양치 도구 외엔 없었지만, 아무렴 어때.
이륙하고 나서 얼마 안 되어 첫 번째 기내식이 나왔다. 아시아나는 쌈밥, 대한항공은 비빔밥이 정석이라지만 왠지 다른 걸 먹어보고 싶었다. 다른 옵션이었던 소고기 스튜를 골랐다. 오... 소고기도 감자도 엄청 부드럽다. 까망베르 치즈가 있길래 음료는 화이트 와인으로. 자고 싶어서 두 잔이나 마셨는데 잠이 하나도 안 왔다...
기내 엔터테인먼트도 종류가 많았는데, 영화 <위시>와 <천박사>를 연달아 봤다. <위시>는 재밌었다. 사람은 현재를 살면서 과거는 추억하고, 미래는 염원한다. 스토리는 누구나 염원하는 무언가를 마음에 품고 산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백성들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그들의 '위시'를 가둬두는 왕과 그를 막으려는 아샤(주인공)와 친구들의 이야기인데, 애니메이션답게 깔끔하고 희망적으로 마무리해서 좋았다. 다만, 노래는 아쉬웠다. 기억에 남는 게 'What I know now~' 들어간 곡밖에 없었다.
<천박사>는 핑계고 강동원&이동휘 편 때문에 궁금해서 본 건데, 오컬트로 가려다 '진실의 고향'쯤에서 머무른 느낌이었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기대보다도 재미없었다. 무서운 시트콤 같달까...?
착륙하기 두 시간 전에 두 번째 기내식이 나왔다. 흰 죽과 계란요리 중에서 골라야 하는데, 고민 없이 후자를 골랐다. 죽은 아플 때만 먹어야지. 고도가 높으면 미각이 둔해져서 음식의 맛이 덜 느껴진다는데, 이마저도 매번 맛있게 먹는 걸 보면 나도 참 먹는 거 좋아한다. 스크램블 에그, 소시지, 버섯, 해시브라운. 소박한 구성인데 맛이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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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또 서울다운 날씨로 나를 맞았다. 후덥지근하고 맑았다. 비행기에서 한숨도 못 잤는데 한국 땅을 밟으니 뻣뻣했던 몸이 스르륵 풀어지는 듯했다.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자!
+)
작년 10월 시카고 여행기에 이어 이번에도 3주간 스페인과 영국에서 여행을 매일 기록했습니다. 뭔가를 쓴다는 그 자체가 좋기도 했지만, 누군가와 여행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게 참 신나는 일이더라고요. 꾸준히 쓰다 보면 제가 즐거운 만큼이나 누군가가 재밌게 읽을 수 있는 글이 되겠죠? 그때까지 힘내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