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0일
온전히 여행할 수 있는 마지막 날이다. 3주 여행의 마무리는 런던 북부에 있는 '밀턴킨스(Milton Keynes)'라는 신도시에서 장식했다. 1967년부터 30여 년간 공사해서 완성한 계획도시라고. 친구네 동네에서도 가까워서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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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한테 밀턴킨스에 가보겠다고 했더니 '보고타 커피 컴퍼니(BOGOTA COFFEE CO.)'라는 카페를 추천해 줬다. 기차역에서 가까웠고, 아침 일찍부터 영업 중이었다.
영국에서 가본 카페 중 규모는 제일 작았는데, 다행히 붐비지는 않았다. 매장 음악도 그렇고 인테리어도 그렇고 차분하면서 힙한 느낌이었다. 바닥과 벽은 나무판자로 되어 있고, 천장은 콘크리트에 철근을 덧대었다.
플랫화이트에 햄치즈 토스트를 주문했다. 여러 차례 시도해 본 결과, 영국 카페에서는 아이스보다는 핫을, 라떼보다는 코르타도나 플랫화이트를 주문하는 게 실패 확률이 낮다!
친구 말이 맞았네. 여기 맛집이네. 커피도 그렇고 평범해 보이는 빵도 따뜻하니 입에 착착 붙는 게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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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겠냐마는, 나는 어느 도시를 가든 큰 공원을 꼭 찾아가 본다. '캠벨 공원(Campbell Park)'은 꽤나 멀었지만 날이 좋아 걸어갈만했다.
갑자기 뻥 뚫린 초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리저리 둘러봐도 건물은 하나도 없는 데다, 평일 낮이라서인지 사람도 나뿐이었다. 윈도우 배경화면 같기도 하고, 증강현실 게임 같기도 하고...
공원은 또 어찌나 큰지, 산책보다는 마라톤이나 자전거 연습하기에 좋아 보였다. 커다란 언덕엔 노란 들꽃이 촘촘히 피어있다. 노랑, 초록, 파랑이 시야를 가득 채우는 이 풍경은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한참을 걷다가 나무 그늘에 냅다 누웠다. 새도 별로 없는지 바람에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가 제일 컸다. 부드럽게 차르르 하는 소리가 들리니 잡스러운 생각들이 지워졌다.
대도시들을 여행할 땐 길을 잃을까 봐, 혹은 소매치기를 당할까 봐 신경이 곤두서있다. 너무 좋으면서도 피곤한 날들이 이어지다 갑자기 무자극의 공간에 와버리니 기분이 참 이상했다.
내가 못 가본, 그리고 평생 못 가볼 장소에 얼마나 생소한 아름다움들이 숨어 있을까. 그런 걸 생각하다 보면 괜히 서글퍼진다. 체력이 있을 때 더 부지런히 돌아다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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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일정은 '미드서머 플레이스(Midsummer Place)'라는 대형 쇼핑몰이다. 웬만한 프랜차이즈 브랜드는 다 들어가 있다. 의도한 건 아닌데 걷다 보니 도착해 버렸다.
레온(LEON)을 보니 괜히 커피를 한 잔 더 마시고 싶어졌다. 스타벅스와 맥도날드 사이에 있는 듯한 레온의 포지션. 가벼운 식사도 할 수 있고, 커피만 마셔도 된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는데, 역시 영국 카페에선 아이스보단 핫이 낫다...
영국의 마트 브랜드 중 하나인 '세인즈버리(Sainsbury)'도 구경했는데, 흥미로운 코너가 눈에 들어왔다. '해비타트(Habitat)'라는 리빙 브랜드가 산하로 들어온 모양인데, 아이템도 다양하고 디자인도 괜찮다! 할머니 드리려고 초록색 머그컵만 하나 샀다.
계산대 앞에서 간식도 하나 샀다. 지하철 광고판에서 자주 본 건데, 초코 코팅 마시멜로였다. 바닐라 마시멜로를 밀크 초코로 감쌌다...? 이걸 지나치면 한국에서도 생각날 것 같아 냉큼 계산했다.
예전에 하리보에서 나온 비슷한 걸 먹어봤는데, 이게 훨씬 맛있었다! 토독하고 코팅을 깨면 입에서 사라진다. 부드럽고 쫀득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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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역으로 돌아가는 길, 영국 하늘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맑고 쨍했다.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하는 여행자의 뒤숭숭한 마음을 날씨가 위로하네...
차도 사람도 없는 이 동네를 전세 낸 것처럼 누비는데 기분이 짜릿했다. 계획도시이니 길도 반듯한 블록 형태라 그냥 앞으로만 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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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먹는 마지막 저녁도 어김없이 친구가 만들어줬다. 마트에서 장본 걸로 야무지게 메뉴를 구성했으니, 비건 연어구이와 아보카도 크림파스타다.
어깨너머로 본 레시피는 이러했다.
1. 비건 연어를 에어프라이어에 살짝 간을 해서 굽는다.
2. 삶은 파스타면에 토마토를 썰어 넣는다.
3. 생크림, 아보카도, 레몬즙 등을 간 소스를 붓고 잘 섞는다.
영국 마트에서 비건식 치킨, 새우, 연어를 먹어봤는데 다 괜찮았다. 연어구이는 두부 맛이 살짝 나도 비린 향은 전혀 없으니 오히려 먹기 편했다. 파스타도 소스 질감은 꾸덕한데 맛은 깔끔해서 싹 비웠다. 친구 덕에 한국에서 자취할 때보다 잘 챙겨 먹으면서 여행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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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아까워 저녁 산책을 나왔다. 내내 밝다가 아홉 시부터 빠르게 어두워졌다. 하늘 중간에만 붉은빛이 가로지르는 게 신기했다. 유난히 하늘 구경할 일이 많았던 하루다.
작년 이맘때도 여기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친구는 내가 여기 쭉 살던 사람 같단다. 일 년이 아닌, 길어야 몇 주 만에 보는 사람 같다고. 그때도 이렇게 밥 해 먹고 산책했던 것 같은데. 일 년 동안 서울에서의 내 삶은 꽤나 다이내믹했던 것 같은데, 여기에 오니 나 자체는 변한 게 없단 생각도 든다.
일상으로 돌아가서 이 순간을 떠올리면 또 전생처럼 느껴질 테지. 아무렴 어때,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산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