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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인 Oct 14. 2019

싸우지 않고 여행하는 법

혼행이 트렌드, 우리는 함께 여행할 수 있을까

막 프라하에 3주동안 머무르고 귀국한 참이다. 본격적으로 프라하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어쩐지 우리의 이야기를 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우리’라 함은 나와 J, 그리고 H다. 글, 그림, 영상까지 각자 다른 특기를 가진 우리 셋은 ‘프로젝트주민’이라는 이름으로 낯선 도시에서 서로의 시선을 담은 창작물을 만들기로 하고 함께 떠났다.


여름의 포르투 한 달, 가을의 프라하 3주, 이 두 여정을 단 한 번의 다툼 없이 셋이 함께 했다. 도합 60일 가까이 되는 모험을 평화롭게 함께 한 우리는 죽마고우거나 척하면 척 모든 부분이 무척 잘 맞는 사람들일까?


H와 내가 함께 썼던 침대


물론 아니기 때문에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우리는 6개월 전 같은 회사에서 만난 직장동료 사이다. 언니동생 하는 막역한 관계도 아니고 여전히 ‘~씨’로 서로를 호칭한다. 여행을 떠날 때가 아니면 좀처럼 만나는 일이 없고, 각자의 내밀하고 사적인 이야기를 공유해본 적도 없다.


아무튼 우리가 그다지 가까운 사이가 아닌데 두 번의 긴 여행을 무리 없이 다녀왔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흔한 일인가 싶기도 해서 우리의 여행이 가진 몇 가지 특징들을 풀어 기억해두기로 했다.



1. 따로 다니는 것이 디폴트다.


주말을 이용해 혼자 갔던 베를린
어느날 혼자 갔던 빈티지숍


우리 셋은 일상적인 성향도 여행을 다니는 방식도 무척 다르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가고 싶은 곳이나 하고 싶은 일이 일치하지 않는다. 나는 최대한 많은 미술관과 빈티지숍에 가고싶다. J는 빵집과 디저트를 잘하는 카페를 좋아한다. H는 좋은 뷰포인트에서 야경을 보는 것을 즐긴다. 우리가 여행을 함께 왔다는 이유로 무조건 매일 동행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매일이 설득과 타협과 포기의 소모적인 반복이었을 것이다.


J와 둘이 갔던 펍


그래서 서로의 일정이 제각기 다르다는 것을 디폴트로 삼고, 매일 저녁 서로의 다음날 스케줄을 이야기하고 흥미가 동하면 합류하고 아니면 각자 다니는 식으로 지냈다. 이렇게 하면서 갈등 없이 각자의 취향에 맞는 여행을 함과 동시에, 함께 여행하는 사람이 있다는 데서 오는 장점, 예를 들면 다양한 음식을 나눠 먹는 것, 서로의 감상을 나누는 것, 혼자서라면 가지 않았을 장소에서 경험의 지평을 넓히는 것 등의 좋은 부분들도 누릴 수 있었다.



2. 그래도 공금은 필요하다.



함께 여행을 다니면 기본적으로 교통, 숙소, 식비와 각종 비용을 같이 쓰게 된다. 아무리 따로 다닌다고 해도 함께 지내는 숙소에서 아침으로 먹을 빵과 잼, 달걀과 과일은 함께 사는 편이 효율적이다. 셋이 이동할 때는 대중교통보다 우버가 저렴할 때도 있으므로 그런 비용들도 공용으로 지출하는 게 낫다.


공금으로 먹었던 꼴레뇨


이외에도 동시에 같은 금액을 지출해야 할 때는 공금이 있으면 매번 각자의 돈을 갹출할 필요가 없어 시간도 절약되므로 웬만하면 공용 통장을 만들어 운용하는 편이 좋다. 우리는 카카오뱅크 모임통장을 만들어 체크카드를 발급 받아 썼다. 각자 회비를 납부할 수 있고 사용 내역을 모두가 확인할 수 있어 편리했다.



3. 어쨌든 모두가 참으면서 지내야 한다.


부엌 식탁 겸 작업 테이블


J의 생활패턴은 초저녁에 잠자리에 들어 이르면 새벽 4시에 기상하는 것이다. 하지만 영상작업을 하는 H는 집에 돌아오면 늦게까지 그날 찍은 자료들을 정리하고는 한다. 나는 작업할 때 쿵쿵거리는 테크노를 듣는 편이고, 혼자만 흡연자다. 무엇보다 화장실은 하나뿐인데 오래 씻는다.


어느날 숙소 테라스에서 함께 먹었던 빵


각자 생활패턴이 무척 달라 분명 서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웬만하면 무던하게 넘어갔다. 자기가 테크노를 좋아한다고 같이 생활하는 집에서 스피커로 테크노를 듣고 앉아있는 나에게 j가 “음...정신 이상해지는 것 같아요ㅠ” 라는 말 외에는 짜증 한 번 내지 않은 걸 떠올려 보면 정말 그랬다(...)


내가 좋아하는 J와 H의 뒷모습


이건 우리가 정말로 무던한 사람들이기 때문은 아니고, 그냥 그런 마음가짐을 가졌기 때문이다. 누가 먹고 설거지를 하지 않은 것 같으면 날선 말 한 마디 하기보다 내가 해치우고, 스트레스 받는 상황에서는 스트레스 받는 사람이 먼저 피했다. 공동생활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피해를 줄 수밖에 없고, 맞지 않는 부분들을 일일이 말로 하다 보면 피치못한 갈등이 생겨난다는 것을 모두가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다.


나와 H


물론 갈등 상황을 회피하고 참는 것이 모든 경우에서 좋은 전략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평생을 함께 살 사람들도 아니고, 여행은 언제나 끝이 정해져있지 않은가. 습관을 맞추기 위해 다투다 보면 결국 이 여정을 온전히 즐길 시간이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어쨌든 상식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서로에게 조금 거슬리는 정도 이상의 폐를 끼치지는 않는다.


어느날 혼자 해먹었던 요리


내가 참는 만큼 남도 참는다. 내가 인지도 못한 채 저지른 온갖 민폐들을 언젠가 그사람 역시 참거나 조용히 해결했을 것이다. 이 간단한 문장들을 떠올리는 것은 상당히 도움이 된다.




내가 좋아했던 H의 빨간 가디건+초록 에코백 조합


두 번의 여행을 통해 우리는 직장동료라기에는 조금 가까워졌지만, 친구라기에는 아직 거리가 있다. 여행 메이트라는 것은 참 기묘한 것이, 내가 정말로 가깝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모르는 나의 부분을 속속들이 보여주게 된다는 것이다. 잠버릇과 살림하는 법부터 좋아하는 아침식사와 사용하는 바디워시의 향까지.

 

언젠가 셋이 함께 마셨던 맥주


많은 사람들이 함께 여행하는 것을 친구와 멀어지는 방법 중 하나로 꼽는다. 나역시 친구와 단둘이 여행하다 스트레스를 받아 면전에서 그의 문제점을 쏘아붙였던 적이 있다. 하지만 (신혼여행이 아닌 이상)동행인에게 거는 기대를 줄이고 내가 어떤 여행을 하고 싶은지, 이번 여행에서 얻어가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에 집중하며 그것에 대해 상대방과 충분히 조율하는 시간을 가진다면, 함께 하는 여행은 오히려 타인과 특별한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는 쉽게 얻어지지 않는 멋진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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