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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인 Mar 04. 2020

집순이도 반한 런던의 펍

나 맥주 좋아하는구나...?

런던을 가게 된 아주 단순한 이유

연차를 써 여행을 가는 건 매우 오랜만이라 목적지를 고를 때 신중했다. 다른 건 몰라도 추위에 쥐약인 나는 2020년 첫 여행지로 타이베이, 방콕, 멀리는 싱가포르까지 생각 중이었다. 


그런데 친구 H의 자취집에 놀러 갔다가 하루 만에 우리나라만큼이나 칼바람이 부는 런던행 왕복 항공권을 결제해버렸다. H로 말할 것 같으면, 저 세상 추진력의 소유자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나 홀로 40일간 북유럽 여행을 떠났고, 운전 연수를 받은 지 몇 달 안 되어 오스트리아에서 하루에 8시간씩 운전대를 잡았다. 대범함이 장점 중 하나인 사람이다.


그런 H가 무던한 예스맨인 날 설득하는 데는 반나절밖에 안 걸렸다.

“나 1월에 대만 갈까 봐. 일주일 정도 느긋하게 쉬다 오려고.”

“어? 나도 1월에 연차 쓸 건데. 런던 어때? 나 런던 안 가봄.”

“아니, 유럽을 그렇게 많이 갔으면서 영국은 안 들렀어?”

“이번에 가려고 그랬나 봐.”

“아…?”



두 달 뒤, 나는 H와 런던행 비행기에 앉아 있었다. 둘 다 전날 저녁까지 야근한 터라 눈 밑이 시커맸다. 비몽사몽인 상태로 시작한 런던 여행은 둘이라서 두 배로 떠들썩했고, 두 배로 즐거웠다. 


동행자가 있는 여행이 좋은 점

‘함께라서 좋은 여행’이 되려면 서로에 대한 배려가 필수다. 배려의 형태는 여행자들이 어떤 관계에 있냐에 따라 다르다. 


주민 P와 함께한 두 번의 한 달 살기는 출장과 여행 그 어딘가였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땐 따로였고, 관광을 하거나 식사를 할 땐 함께였다. 직장 동료로 시작한 인연이기에 서로의 라이프스타일과 취향을 존중하며 장기 여행을 즐겼다.

(P가 이런 글도 썼었다: 싸우지 않고 여행하는 법)


이번 여행은 그와 달랐다. 11년 지기 절친과 함께하는 온전한 자유 여행이었다. 하루 종일 붙어 있었기에 혼자라면 가지 않을 곳도 가보고, 먹지 않을 음식도 먹어보았다. 반대로 하고 싶은 걸 양보하기도 했다. 


그렇게 혼행과는 조금 다른 색의 여행이 됐다. 


맥주 한 잔의 즐거움

H는 술을 좋아한다. 사람들과 함께하는 술자리도, 술 자체도 즐길 줄 안다. 당연히 밤늦게 노는 것도, 북적북적한 분위기도 익숙한 사람이다.


나는 반대다. 이전에 내 라이프사이클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지금도 똑같다. 나는 새벽 5시에 일어나 지는 해를 보며 귀가하는 사람이다. 사람이 많은 곳은 되도록 피하려 한다.


그런 내가 H와 함께함으로써 런던에서는 ‘풍류’가 있는 매일을 보냈다. 마음껏 먹고 마셨다는 이야기다. 하루의 마무리는 무조건 펍이었다. 시원한 맥주를 앞에 두고 수다를 떨거나 사진을 정리했다. 


두 번이나 간 타워브릿지 근처 펍


가끔은 옆 테이블에 앉은 현지인이 말을 걸기도 했다. 세인트 스테판 태번(St Stephen's Tavern)이라는 웨스트민스터 사원 근처 펍에 갔을 때다. 배가 고파 맥주 두 잔에 피시 앤 칩스도 주문했다. 


바로 튀긴 생선이 맛없을 리 없다. 칼과 포크를 부지런히 움직이며 먹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서 자꾸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5분 후, 내 대각선에 앉아 있던 붉은색 머리의 남자가 말을 걸었다.

"그거 타르타르소스랑 같이 먹어야 하는데."

"응?"

"거기 그릇에 있어. 타르타르소스. 파란색 포장지. 그거랑 먹으면 더 맛있어."


하얀색 도자기 그릇에 담긴, 소포장된 각종 소스


그의 말이 맞았다. 유튜브에서는 그냥 먹던데. 짜지 않고 고소한 타르타르소스를 열심히 튀김에 발라 먹고 있는데 어디에서 왔냐는 물음이 이어졌다. 그렇게 30분을 대화했다. 두 영국인은 케이터링 업체에서 일하는 셰프였다. 


펍을 갈 때마다 이야깃거리가 생겼다. 퇴근, 혹은 하교 후 지인과 맥주를 홀짝이는 현지인들 사이에 앉아 있는 게 일상이 됐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라는 8개월 간의 런던 여행기를 담은 책에서는 펍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동네 주민의 사랑방 같은 공간이었다. 밖에서는 그렇게도 폐쇄적으로 보이던 공간이 막상 들어서니 참으로 아늑했다. 처음 온 나도 마치 단골처럼 의자 깊숙이 파고들게 했다.


대도시에 있는 사랑방이라니, 어떻게 안 좋아할 수가 있을까. 런던에서 맥주 한 잔의 매력에 눈을 뜬 나는 한국에 돌아와서도 그 맛을 잊지 못했다. 


한정판 칭다오 잔은 참 예쁘다


물론, 그 맛은 저녁 9시 전에 집에서 즐겨야 마음이 편하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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