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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인 Mar 11. 2020

런던에 살고 있는 믿음직스러운 가이드

5년마다 와야 할 도시가 생겼다

2015년 여름, 런던과의 첫 만남

첫 유럽 여행은 2015년 여름이었다. 친구 S와 함께 70일간 8개의 나라를 돌아다녔다. 경비는 700만 원 조금 넘게 들었다. 28인치 캐리어 하나와 등보다 큰 배낭이 짐의 전부였다. 호기심은 많고 겁은 없던 때였다. 또, 시간은 많고 돈은 없던 때이기도 했다. 지금은 둘 다 없지만. 


기말고사가 끝나자마자 얼렁뚱땅 짐을 싸 공항으로 갔다. 런던이 우리의 첫 도시였다. 망설임 없이 '런던 in'을 결심한 건 D 때문이었다. D는 우리와 같은 고등학교를 다니다 졸업 후 영국으로 이민 갔다. 나만 믿으라길래 정말 D만 믿고 런던으로 날아갔다. 


2015년에 런던행 비행기 안에서 찍은 사진. 로마 가이드북을 읽고 있었나 보다. 


D는 히드로 공항 2 터미널로 우리를 마중 나왔다. 물 흐르듯 대중교통 이용권인 오이스터 카드를 사 숙소까지 가는 지하철을 탔다. 주머니 가벼운 대학생들에겐 호텔은커녕 멀끔한 에어비앤비도 사치였다. 방 한 칸에 침대가 공간의 반은 차지하는 숙소에서 우리 셋은 새벽까지 수다를 떨다 지쳐 잠들었다. 



2020년 1월, 런던과의 두 번째 만남

그리고 5년 뒤, 다시 런던에 갔다. S 대신 또 다른 고등학교 친구인 H와 함께였다. 방학맞이 배낭여행을 떠나는 대학생이 아니라 설 연휴에 연차를 붙여 쓴 직장인이었다. 일정을 미리 계획하기는커녕 숙소만 겨우 예약한 상태로 여행을 시작했다. 시간 따라 많은 것이 변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예를 들면, D는 여전히 런던에 있다는 것과 그를 보러 가는 길이 설렘 가득하다는 것. 


5년 전처럼 히드로 공항 2 터미널에서 머리 위로 손을 붕붕 흔드는 D를 보자 대학생 때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칼같이 퇴근했는데도 조금 늦어 미안하다며 숨을 고르는 D는 짧아진 머리와 얇아진 안경테 외엔 변한 게 없었다. 


지하철 안에서 우리는 각자의 근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D는 얼마 전 정규직 영국 도비로 거듭났다고 했다. 아직까지는 일도 재밌고 사람도 좋다고 말하는 D를 보니 시간의 흐름이 조금 실감 났다. 그날 저녁, D는 우리가 예약한 에어비앤비에서 저녁을 먹고 워털루에 있는 자취집으로 돌아갔다. 


첫 끼부터 까르보 불닭 라볶이를 먹었다. K-푸드 최고. 


런던에 있는 일주일간 시간이 맞을 때마다 D와 만났다. 런던의 홍대라 불리는 '해크니'라는 지역에 가서 '브로드웨이 마켓'을 구경했다. 저녁으로는 근처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먹었다. 'Buen Ayre'라는 곳인데, 맛도 분위기도 아주 만족스러웠다. 참고로, 특이한 음식을 경험해보고 싶다면 '차가운 소 혀' 요리를 추천한다. 아주 부드러운 수육에 상큼한 소스를 끼얹은 듯한 식감과 맛이었다. 


차가운 소 혀 요리. 생각보다 맛이 생소하지 않다.


맛있는 음식과 와인을 앞에 두고 우리는 2시간 가까이 많은 이야기를 했다. H는 회사 생활이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삶이 권태로워졌다고 했다. 나는 오랜만에 경험하는 조직 생활과 회사 업무가 답답하다고 했다. D는 이민자로서 런던 사회에 흡수되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고 했다. 립아이 스테이크와 우둔살 스테이크가 다 식을 때까지도 우리의 수다는 멈추지 않았다.


브로드웨이 마켓 근처 'Buen Ayre'. 



처음은 새롭고, 그다음은 편안하고

2015년 여름에 D는 우리를 데리고 버킹엄 궁전, 그린파크, 포토벨로 마켓 등 관광지를 돌아다녔다. 처음 경험하는 거대 도시에 S와 나는 두 눈과 카메라에 새로운 풍경을 담느라 바빴다. 2020년 1월, H와 나는 D의 런던에서의 일상을 나누었다. 그의 사무실을 구경하고, 같은 건물 10층에 있는 야외 테라스에서 런던 야경을 실컷 구경했다. D의 회사와 비슷한 모습을 한 건물들이 조금씩 다른 빛으로 반짝거리는 걸 한참 보다 근처에 있는 펍에서 하루를 마무리했다. 


'The White Hart'라는 펍. 테이트 모던 근처에 있는 펍이다.


같은 도시를 두 번 이상 여행할 일은 많지 않다. 세상은 넓고 가고 싶은 곳은 너무나 많으니까. 그런데 다시 온 런던은 낯설지 않으면서도 5년 전과 달랐다. 첫 번째 런던 여행이 경이로움으로 가득했다면, 두 번째는 편안함이 더해졌다. 믿음직스러운 가이드인 D 덕분이었다.


D는 우리가 본인의 도움을 받아 더 편하고 즐거운 여행을 하길 바랐고, 우리는 런던에서 반복적인 매일을 살아가던 D에게 얼마 간의 활력소가 되길 바랐다. 떠나는 날 베이커 스트리트 근처 식당에서 선데이 로스트와 피시 앤 칩스를 먹으며 우리는 모두의 바람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했다. 


'The Larrick'이라는 식당. 선데이 로스트를 기대했는데 피시 앤 칩스 맛집이었다.


나는 5년 만에 런던을 새로운 색의 추억으로 덧칠했다. 


D의 회사 건물 10층에서 본 런던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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