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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인 May 24. 2020

미운 정 고운 정의 도시, 파리

첫인상이 전부는 아니니까

Paris is always a good idea.

유명한 이 문장을 나는 <파리는 언제나 사랑>에서 처음 봤다. 무난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글로 풀어놓은 듯한 이 책은 파리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의 일부였다.

 

당신에게 충분한 행운이 따라주어서 젊은 시절 한때를 파리에서 보낼 수 있다면 파리는 마치 '움직이는 축제'처럼 남은 인생에 어딜 가든 늘 당신 곁에 머무를 거라고.

헤밍웨이가 7년간 파리에 살며 경험한 일과 느낀 감정을 담은 산문집 <파리는 날마다 축제>에 나오는 문장이다. 파리에 낭만의 이미지를 덧입히는 작품은 수없이 많다. 나는 책 두 권(방금 언급함)과 영화 두 편을 골랐다. 영화는 <라따뚜이><미드나잇 인 파리>를 봤다. 


재밌었지만 설레진 않았다. 파리는 나에게 런던을 가는 김에 잠깐 들르는 곳, 회색 하늘이 익숙한 곳, 그리고...


첫인상이 아주 안 좋았던 곳이었다.



2015년 7월 1일

화가 나고 너무 황당하다. 

퐁피두 센터 가는 길에 승연이가 핸드폰을 날치기당했다. 현지인과 관광객이 한데 섞여 어쩔 줄 몰라하는 우리 둘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른 소지품까지 뺏길까봐 무서웠다. 


파리 여행 2일차였다. 친구는 산지 보름밖에 안 된 휴대폰을 눈 앞에서 잃었다. 급히 숙소로 돌아와 근처 경찰서에서 분실 신고를 했다. 친구는 남은 두 달을 나의 미러리스 카메라만 목에 건 채 유럽 곳곳을 여행해야 했다. 


이 사건 외에도 파리 여행엔 크고 작은 얼룩이 참 많았다. 비가 안 온다길래 샌들을 신고 에펠탑을 보러 간 날, 발가락 사이에 새똥을 맞았다. 민박집에서 자다가 이상한 기운에 방 불을 켰다가 열린 캐리어 속에 들어간 쥐와 눈이 마주친 적도 있다. 대담한 쥐는 기념품으로 산 초콜릿을 갉아놓고 도망갔다. 


"그래서, 이번엔 파리 안 가겠다고?"

"..."
"에펠탑 안 보겠다고? 크로아상은? 바게트는? 빵 안 먹겠다고?"

"짧게만 가자."


결국 2020년 1월 29일, 런던에서 파리로 가는 유로스타를 탔다. H와 나는 둘 다 말을 잃은 상태였다. 버스와 지하철을 번갈아 타고 세인트 판크라스 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게이트가 닫힌 뒤였다. 현장에서 다음 열차 승차권을 샀다. '역시 안 맞아'라고 생각하며 좌석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5년 만에 온 파리 북역은 낯설지 않았다. 다만 기억보다 깨끗했고, 한적했다. 우버를 타고 숙소로 가는데 맑은 날씨 때문인지 기분이 점점 좋아졌다. 숙소엔 에펠탑이 멀지만 확실하게 보이는 창이 있었다. 


한 시간도 안되어 어두워진 하늘(...)


가볍게 산책이나 다녀오자 싶어 숙소를 나섰다. 

"산책을 대체 몇 시간을 하는 거야."

"아직 두 시간도 안 걸었는데 무슨 소리야."

"여기서 잘 거야? 돌아가는 시간은?"


'여기'는 바로 에펠탑이 있는 공원(Parc de la Tour Eiffel). 커다란 철탑을 보자마자 반가운 마음이 불쑥 솟아 당황스러웠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파리 여행에 시큰둥했던 내 모습이 생각나 머쓱하기도 했다. 


코앞에서 한참을 바라본 에펠탑


추억을 품고 있는 장소를 만나면 그때로 되돌아간다. 5년 전, 나는 이곳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친구와 나란히 서 있었다. 2유로짜리 바게트 샌드위치를 뜯어먹으며 관광객을 구경하기도 했다. 


칼바람 부는 날씨 때문인지, 공원 한쪽에서 공사를 하고 있어서인지 2020년 겨울의 에펠탑 주변은 휑했다. 그럼에도 줄줄이 떠오르는 기억의 조각들에 발을 쉽게 떼지 못했다. 생각해보니 프랑스 대혁명 기념일도 여기서 보냈다. 


2015년 7월 14

에펠탑 앞 샤이오 궁은 통제 중이라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일단 근처 공원에 가서 쉬려는데 갑자기 승연이 발에 새똥이 떨어졌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일이 안 되려니까 별 일이 다 생기네;;;

(중략)

대혁명 기념일엔 에펠탑 공원에서 불꽃놀이를 한다. 그리고 난 오늘 그걸 봤다. 파랑, 빨강, 하양으로 에펠탑이 물들고 하늘엔 쉴 새 없이 불꽃이 터진다. 


새똥 맞은 날과 같은 날임에 한 번 놀라고, 즐겁고 들떠 보이는 일기에 두 번 놀랐다. 나는 파리를 조금 오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2015년 7월 프랑스 대혁명 기념일에 찍은 에펠탑


그날 밤, 가벼워진 마음으로 숙소 침대에 누웠다. 남은 이틀은 파리 곳곳에 새로운 추억을 남기는 시간이었다. 


아침은 동네 빵집에서 잔뜩 사 온 빵과 치즈로 시작했다. 갓 구운 빵은 정말 즉각적인 행복을 가져다준다. 


나도 H도 관광지 방문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가고 싶으면 밤에 갔다. 거리의 화가도, 기념품 판매상도, 관광객도 없는 고요한 몽마르뜨는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났다. 


그 맞은편엔 환상의 야경이 있다. 


마지막 날 저녁은 샹젤리제 거리에서 보냈다. 비를 좋아하지 않는데도 비 오는 파리를 볼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런던으로 돌아가는 날 아침, 짐을 정리하는데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 겨우 말을 트기 시작한 친구와 헤어지는 느낌이었다. 미운 도시였던 파리가 5년 만에 정든 도시가 됐다. 


글의 맨 앞부분에 인용한 문장을 이렇게 고쳐 말하고 싶다. 

Paris is maybe a good idea.


아직은 나에게 사랑도, 축제도 아닌 파리지만 그래도 오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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