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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인 Aug 28. 2021

<아무튼, 여름>과 함께 여름 끝자락 즐기기

샤인머스캣과 초당옥수수로 느낀 여름의 맛

이 여름의 끝을 잡고

작년 추석, 강릉에 여행을 다녀왔다. 마지막 날 방문한 '고래책방'이라는 곳에서 <아무튼, 여름>을 샀다. 여름이 훌쩍 지난 뒤에 여름에 대한 책을 대체 왜 샀는지 모르겠지만 서울로 돌아오는 고속버스 안에서, 그리고 서울로 돌아와서도 때때로 들춰보곤 했다.


여름철 나의 몸은, 강한 햇빛 아래에서는 살갗이 울긋불긋 달아오르고 여러 명이 함께 자면 모기의 집중 공략 대상이 되어버려, 안팎으로 난리법석이다. 신체적 불편함은 감정적 불호로 이어졌다. 더위보다 추위를 많이 타는데도 여름은 나에게 얼른 지나갔으면 하는 계절이었다.


그런데 <아무튼, 여름>을 올해 여름 초입에 다시 읽으며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 내가 여름의 단편적인 면만 보고 불호의 범주로 던져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름이 왜 좋은지에 대해 위트 있게 늘어놓은 작가의 말에 서서히 설득됐다. 8월의 마지막 주말을 보내고 있는 시점에서 생각해보면, 나도 이번 여름은 나쁘지 않은 기억들로 채워 넣은 것 같다.


축하할 일은 딱히 없지만 샤인머스캣을 먹어보자

작가는 특별한 날이면 자축의 의미로 백화점에서 과일을 산다고 한다. 과일은 자고로 비싼 게 맛있기 때문이라는데, 어느 정도 공감한다. 가격이 착한 과일이 맛까지 착한 경우도 있지만, 아무래도 가격이 높은 쪽이 맛의 성공률도 높다. 뭔가를 축하하고 싶은 날엔 굳이 모험을 하고 싶지 않고, 그러니 맛이 보장된 백화점 과일 코너로 직행하는 것이다.


여름에는 단연 샤인머스캣을 찾게 된다는데, 그는 '노동 후 맛보는 최고의 단맛'이라 표현했다. 여기에는 공감하지 못했다. 샤인머스캣은 여러 번 먹어봤지만 소름 돋게 맛있거나 행복하다고 느낀 적은 없다. '샤인'이라는 수식어 때문에 단맛만큼 상큼한 맛도 반짝반짝 강렬할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단맛만이 극대화된 통통한 청포도 같았다. 그러고 보니 껍질도 반짝이지 않고 반들반들하니 무광의 연두색이다.


어떻게 하면 이 금 같은 포도를 맛있게 먹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다 시큼새큼한 과일과 조합하면 되겠다고 결론지었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어본 결과, 파인애플과의 궁합이 찰떡이다. 둘 다 과즙이 많고 단맛이 강해 서로에게 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식감은 너무나 달라서 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가벼운 화이트 와인이나 피노누아와 즐기면 이곳이 축제의 장이다.


작가는 한 송이에 1만 7800원인 샤인머스캣으로 스스로를 격려하며 좋은 일을 기념했다. 나는 축하할 일도 없는데 2만원이 훌쩍 넘는 돈을 몇 번이나 썼다. 괜한 사치를 부리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미래의 행복에 대한 외상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초당옥수수와 가까워지려는 노력

작가는 대한민국에 여름이 존재하는 이유 중 하나는 초당옥수수 때문이라고 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독자로서 안 먹어볼 수 없지. 단옥수수의 대표적인 품종이라는 초당옥수수는 어쩐지 샤인머스캣과 닮았다. 아삭 거리는 식감과 촉촉한 속살, 그리고 닦아놓은 듯 반질반질한 겉모습까지.


초당옥수수가 더 신선한 충격이었던 건 예상한 범주의 맛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샤인머스캣은 기존의 포도에서 단맛을 많이 첨가하고 신맛을 조금 뺀 정도로만 변주한 맛이다. 그런데 초당옥수수는 한 입 먹자마자 "이게... 옥수수라고?"라는 반응이 튀어나왔다. 생으로 먹는, 달달한 채즙으로 가득한 옥수수라니. 묘하고 낯설었다. 평양냉면을 처음 먹을 때의 기분과 비슷했다. 평양냉면처럼 세 번은 먹어봐야 참맛을 느낄 수 있을까 싶어 초당옥수수에게 몇 번의 기회를 더 주기로 했다.


하나, 전자레인지에 2 돌리기. 파인애플을 구워 먹는  같다. 아삭하고 달아서 다른 쪽으로 낯선 맛이었다. , 찰옥수수처럼 찜기에 20 쪄보기.  입맛에는 별로다. 찜기에는 호빵이나 만두처럼 쫀득하고 부드러운 식감의 음식을 조리해야 매력이 배가 된다. , 디저트로 먹어보기. 초당옥수수를 듬뿍 넣어 시즌 한정 메뉴를 개발했다는 카페들에서 푸딩과 휘낭시에를 먹어보았다. 맛있지만 주재료가 다른 것일 때가  좋다. 예를 들면 고구마나, 딸기나, 레몬 같은 것.


몇 번의 맛 실험이 성공적이지 않자 의욕이 살짝 시들해졌다. 얼마 후 지인이 초당옥수수 두 개를 나눔 했다. 상아색과 노란색을 섞어놓은 듯한 옥수수 알들을 바라보다 별 기대 없이 생으로 한 입 베어 물었다. 촙촙촙 아삭아삭아삭... 나 초당옥수수 좋아하네. 돌고 돌아 생으로 먹는 초당옥수수가 제일 내 취향이었다.


여름이 지나는 게 조금 아쉽다

사실 내 입에는 오리지널이 더 맛있다. 껍질 채 먹는 타원형의 청포도도 좋고, 알마다 씨가 한두 개씩 들어있는 거봉은 없어서 못 먹는다. 옥수수도 김이 모락모락 날 때 호호 불어가며 야금야금 먹는 찰옥수수가 좋다. 혀에서 느끼는 새로운 단맛보다 음식에 겹겹이 쌓인 은근한 추억의 맛에 더 끌려서인가 보다. 마트에서 할머니에게 거봉을 사달라 조르던 어릴 적의 나, 그리고 친구네 집에서 갈색 반점이 군데군데 있는 찐 찰옥수수를 뜯어먹는 친구와 나. 그 외에도 기존의 포도나 옥수수가 나에게 익숙한 맛이 되기까지 일상적인 순간들을 꽤 많이 경험했겠지. 그에 비해 트렌디한 샤인머스캣과 초당옥수수에는 집 안에서 요리조리 맛있게 먹을 궁리를 하는 내 모습만 잠깐씩 스친다. 아삭 거리는 이 달달한 채소와 과일도 몇 번의 여름을 함께 보내고 나면 단맛만큼이나 아련한 추억의 맛이 느껴질 테지.


"좋아하는 게 하나 생기면 그 세계는 그 하나보다 더 넓어진다." 작가의 말처럼 나는 여름을 조금 좋아하게 됐고, 그로 인해 즐거움의 세계가 확장됐다. 소소하게 흥미진진했고, 집에만 있어도 간간히 즐거웠다. 나는 <아무튼, 여름> 속 샤인머스캣과 초당옥수수만 언급했지만 작가는 훨씬 더 많은 '여름의 입덕 포인트'를 소개한다. 혼술 하기, 냉면 먹기, 머슬 셔츠 입기, 야외에서 책 읽기 등. 앞으로 다가올 여름마다 새로운 경험에 대한 선택지가 놓여 있는 것 같아 신이 난다.


여름이 그저 그런, 혹은 싫은 분들은 내년 5월에 이 책을 사서 6월부터 여름의 속도에 맞춰 읽어보면 좋겠다. 책 속의 에피소드를 각자의 취향대로 경험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하니 즐겁다. 이번 여름의 마무리로 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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