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노마드로 살게 된 썰

얼렁뚱땅 버킷리스트를 하나 이뤘다

by 이재인

2022년 5월 14일, 논현역 커피빈에서

기어코 디지털 노마드가 됐다.


올해 2월, 2년 반 동안 다닌 회사를 그만뒀다. 작년 말부터 이직을 준비했으니 충동적 결정은 아니었다. 퇴사하고 딱 일주일 쉬었다. 제주도에 있었고, 책을 많이 읽었다. 글은 써야겠다, 써야겠다, 하면서 한 자도 쓰지 못했다.


눈이 소복이 쌓인 한라산도 올랐더랬다.


새 회사는 업계에서 주목받는 핀테크 기업이었다. 재테크는커녕 경제 뉴스는 봐도 모르는 나였지만, 면접 준비서부터 조금씩 파보니 돈 공부는 생각보다 재밌었다. 그래서 회사 일에도 금방 흥미를 붙였다. 성장 궤도를 달리는 스타트업답게 자율과 책임을 조직 문화로 내세우고 있었는데, 자율적으로 오래 일했고 담당이 아닌 일에도 책임감을 가졌다.


그런데 말이지, 왜 모든 문장이 과거형일까? 그렇다. 어렵게 들어간 그 회사, 2주 전에 그만뒀다. 우선은, 명목상이 아닌 실제의 조직 문화가 나와 맞지 않았다. 일이 아닌 다른 요소들로 고민하는 시간이 나를 괴롭혔다. 첫 회사였던 대기업도 그래서 1년 반 만에 퇴사했다.


일단 결정을 내리면 뒤돌아보는 성격은 아닌데, 결정을 하기까지가 오래 걸린다. 가족에게, 선배들에게, 친구들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답은 정해져 있는데 대부분 반대의 의견을 내놓았다. 보통의 회사들이 다 그렇다고 했다. 나는 또 고집이 센 편이다. 며칠 밤을 생각하고 생각하다 보통으로 살지 않기로 했다.

과감해도 무모하게 행동하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은 직장 없이, 돈 없이 무언가에 도전할 용기가 부족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퇴사 사유는 이직이었다.


현 회사는 한국에 사무실이 없다. 영국의 '요크'라는 도시에 있다. 직원은 120명인데, 한국인은 나 하나다. 팀원은 8명인데, 나 외에는 모두 유럽에 거주한다. 그래서 나만 근무 시간대가 다르다. 매일의 스카이프 회의를 시작하는 인사말은 모두가 '굿모닝'인 와중에 나 혼자 '굿애프터눈'이다.


토종 한국인인 나는 모든 게 너무 생소하다. 영어로 업무를 해본 적은 있어도, 영어로만 대화하고 메일을 쓰고 문서를 만든 적은 없다. 게다가 외국인 친구도 없다. 그래서 안부를 묻는 말에도 두뇌 풀가동해서 답을 해야 한다. 프로젝트를 완전히 이해하려면 관련 문서를 업무 외 시간에 다시 읽어봐야 한다.


그래도 즐겁다. 일하는 시간과 공간 선택에 자유를 갖게 되었고, 일 자체에 열정을 쏟고 있다. 대신, 울타리가 없는 만큼 내가 나의 관리자 역할을 잘해야 한다. 일에 대한 규칙을 세우는 것도, 성장을 위한 노력을 하는 것도 나의 몫이다. 직장인으로서 일에 대한 동인을 온전히 내면에서 끌어올린다는 게 쉽지 않은 도전으로 느껴진다.


이렇게 디지털 노마드가 됐다. 2019년에 유럽에서 두 번의 한달살기를 한 뒤로 디지털 노마드의 꿈을 마음 한 켠에 품고 살았다. 포르투의 에어비앤비 부엌에서 살금살금 키보드를 두드리던 새벽과 프라하의 동네 카페에서 카푸치노를 마시며 그림 그리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이제부터 조금씩이라도 디지털 노마드의 일기를 써보려 한다. 머쓱하지만 오늘은 디지털 '집순이'의 썰이었다. '노마드스러운' 일상은 회사 생활이 안정기에 접어들면 향유해야지. 아직까지는 팀원들과 스몰토크만 해도 뒷목에 땀이 난다.


가끔은 디지털 노마드의 '그림' 일기를 올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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