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하기 싫지만, 조금 심심했다
2022년 5월 21일, 길음동 본가에서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어느 때보다 이 문장을 체감한 일주일이었다.
주 5일 사무실 출퇴근 시절에도 프리랜서로 조금씩 일을 했기에, 완전 원격근무가 어색하지는 않았다. 일하는 시간과 공간의 자유로움은 확실히 일의 효율성과 삶의 질을 높였다. 입사한 지 한 달도 안 되었기에 아직 일의 양이 많지도 않다.
요즘 나의 하루는 이렇다. 아침 6시 전에 일어나 책을 조금 읽고 아침을 먹는다. 두유는 꼭 챙겨 마시려고 한다. 샤워를 하고 오전 근무를 한다. 중간에 드립백으로 커피를 내리거나 차를 우린다. 12시쯤 점심을 먹는다. 일을 하다 중간에 밥을 먹는 건 왜 이렇게 귀찮은지. 아침보다 간단히 차려 먹는다. 달걀과 현미밥은 디폴트. 식곤증 방지를 위해 잠깐 산책을 나간다. 논현동은 1년 내내 무언가를 부시고 짓는 동네이기에, 힐링보다는 소화가 목적이다. 집에 돌아와 오후 근무를 한다. 오후 5시에 팀원들과 일간 화상회의를 한다. 보통은 한 시간, 길게 하면 두 시간. 회의 종료와 함께 나의 근무도 셔터를 내린다.
저녁 자유시간은 운동 가는 것부터 시작이다. 일주일에 3회 이상은 동네 헬스장에 간다. 러닝머신 위에서 30분 이상 땀을 뻘뻘 흘려줘야 뭐라도 한 것 같다. 집에 돌아오면 과일이나 채소로 요기한다. 칼칼히 씻고 나서는 책을 읽거나 영 집중이 안되면 유튜브를 보거나 인스타그램을 구경한다. 룸메이트가 귀가하면 거실 테이블에서 수다를 떨며 각자 할 일을 한다. 미국 MBA 준비가 한창인 룸메는 아이패드로 강의를 보거나 제본된 문제집을 풀고, 프리랜서로 매주 책 리뷰를 기고하는 나는 글쓰기나 책 읽기에 매달린다. 밤 12시가 가까워지면 신데렐라처럼 각자의 방으로 사라진다.
평일에는 보통 이렇게 생활한다. 사무실 출퇴근만 안 했지 몇 달 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다. 물론, 내가 계획하지 않은 일에 시간을 쏟지 않게 되었다. 예를 들면, 대중교통을 통한 출퇴근이나 예상치 못한 야근 등. 게다가 우리 팀은 나를 제외하고 모두 유럽인이라, 실시간으로 채팅을 하거나 메일 커뮤니케이션을 할 일이 (아직까지는) 많지 않다. 이것이 내가 그렇게나 갈망하던 자유로운 직장인의 모습이구나. 평일 낮에 은행도, 병원도 갈 수 있는 삶. 디지털 노마드의 기쁨은 내가 상상하던 그것과 같았다.
그런데 말이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들이 있다. 바로 디지털 노마드의 슬픔이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서 에너지를 얻는 편은 아니지만, 회사를 다니며 좋은 동료들을 많이 만났다. 특히, 전우애가 기본 옵션인 광고대행사를 다니는 동안엔 광고 일도, 사회생활도 선배들에게 많이 배웠다. 야근하고 나서 마시는 맥주 한 잔의 매력도 이때 알았다. 지금은 야근 없이도 잘만 마시지만.
모순적이지만 사람들과 부대끼는 것, 싫으면서도 조금 그립다. 최근의 내 일상은 기복이 별로 없다. 화날 일도 없지만, 그렇다고 크게 웃을 일도 없다. 오후 5시 화상 회의 전까지는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내뱉지 않는 날도 있다. 입을 열면 업무 이야기를, 그것도 영어로 한다. 내가 영어를 기가 막히게 잘하면 또 몰라. 아직도 영어만 하면 머릿속에서는 실시간으로 단어 조합하느라 바쁘다.
인정하긴 싫지만, 이번 주는 조금 심심했다. 그래서 일하는 환경을 조금 바꿔보았다.
월요일, 공유 오피스 1차 방문
1주일간 공유 오피스 라운지를 체험할 수 있는 패스권을 프로모션 하길래 충동적으로 지난 일요일에 등록했다. 맥북과 사무용품, 점심으로 먹을 약간의 과일 등을 바리바리 싸들고 역삼점에 갔다. 첫인상은 직장인 버전 독서실 같았다. 매우 조용해서 집에서보다 더 졸음이 쏟아졌다. 어찌어찌 오전 근무를 마쳤는데 띄엄띄엄 앉아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캔틴에 삼삼오오 모였다. 뭐야, 다들 같은 회사였나봐. 왠지 모를 배신감에 더 외로워졌다. 오후 3시쯤 귀가하여 하루의 나머지는 원래대로 보냈다.
수요일, 공유 오피스 2차 방문
첫 회사 사수와 매봉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조금 일찍 오전 근무를 마치고 약속 장소로 이동했다. 잠봉뵈르 샌드위치와 샐러드를 먹었다. 에스프레소 바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처음 만났던 그 회사에 사수는 아직도 다니고 있고, 나는 몇 번 소속을 옮겼다. 냅다 디지털 노마드가 되었다는 내 말에 사수는 잘했다고 했다. 왠지 그럴 것 같았다,라고 하며.
오후에는 등록해놓은 공유 오피스의 삼성점에 가봤다. 역삼점은 지하였는데 삼성점은 지상이었고 밝았다. 그런데 그 넓은 공간에 나밖에 없었다. 하루 종일 혼자 있는 게 심심해서 공유 오피스를 등록한 건데 이거 참. 그래도 일이 바빠 시간이 빨리 갔다. 화상 회의 때 팀원들에게 '코워킹 스페이스'에 있다며 스몰토크를 시도했다. 다들 상냥한 사람들이라 민망하지 않게 리액션을 해줬다.
목요일, 서촌 카페에서 오후 근무
공유 오피스를 또 갈까 하다가 룸메이트를 따라 서촌에 갔다. 시청역 근처에서 건강검진을 받고 온 룸메는 점심을 먹을 때까지도 수면 내시경의 여파로 헤롱거렸다. 중식을 먹었고, 근처 카페에서 후식을 먹었다. 집에서 오전 근무를 좀 길게 했는데도 점심시간을 한 시간 이상 쓰고 있다는 게 양심에 찔렸다. 아직도 사무실 직장인의 피가 내 몸에 흐르나봐.
조금 걸어서 안국에 있는 스타벅스에 자리 잡았다. 적당히 시끌시끌했고, 오랜만에 생기 있는 공간에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룸메는 MBA 강의를 들었고, 나는 소비자 반응 분석 리포트를 썼다. 외국 회사도 에이전시는 하는 일이 비슷하구나. 5시에는 팀 회의를 했고, 6시에는 전사 회의를 했다. 노트북 화면을 빼곡히 채운 50개가 넘는 얼굴들을 보며 간단히 자기소개를 했다. 어김없이 뒷목에 식은땀이 났다. 7시쯤 귀가했다.
토요일, 심심해도 평일보단 주말
그리고, 오늘 본가에서 이 글을 쓴다. 금요일은 책 리뷰 마감일이라 심심할 틈이 없었다. 잠깐, 그동안 내가 일이 안 바빠서 심심했던 건가? 근데 사람이 어떻게 일만 하고 살아.
본가 와서 가족끼리 점심을 먹었고, 그 어느 때보다 말을 많이 했다. 도서관에 다녀와서 유튜브를 보다 낮잠을 좀 잤다.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타자를 치다가 하는데 일주일을 돌아보니 나름 재밌었던 것 같다. 디지털 노마드의 외로움을 받아들이고, 가끔은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을 요리조리 찾아봐야겠다. 주 1회 정도는 사람 구경을 하고 싶은데, 공유 오피스 정기권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