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읽어본 소설 덕후들의 pick
한주 건너뛰고 돌아왔습니다!
저는 방콕으로 가족 여행을 다녀왔는데, 다들 여름 휴가 다녀오셨는지 모르겠네요. 여행글도 다시 올리고 싶은데, 이번엔 가이드 역할로 여행을 다녀온지라 어떻게 글로 정리해야 할지 고민이에요.
어쨌든, 오늘도 책을 리뷰해보려고요. 원티드의 '북러버 모임'은 2주가 넘게 지났지만, 아직도 모음에서 추천받은 책들이 쌓여 있는데요. 그중에서도 유독 추천이 많은 책이 있었으니, 바로 천선란 작가의 <천 개의 파랑>입니다. 2019년 한국과학문학상 장편대상을 받은 작품으로, 최근 몇 년간 가장 사랑받은 SF이기도 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왜 소설 덕후들이 그렇게 추천했는지 이해되더라고요. 과학기술에 지식이나 관심이 많지 않아도 이해가 잘 될 뿐더러, 이야기 자체도 흡인력이 뛰어나 처음부터 끝까지 몰입할 수 있었어요.
<천 개의 파랑>을 한 줄로 소개하자면, 경마를 위해 만들어진 휴머노이드와 마음에 상처 많은 가족이 만나 안락사를 앞둔 경주마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입니다.
시대적 배경은 2035년으로, 각종 로봇이 서비스업을 비롯해 인간 노동의 일부를 대체하고 심지어 경마 등의 유흥을 목적으로 하는 로봇들도 등장합니다.
주인공 로봇 '콜리'가 바로 그런 로봇입니다. 기수(騎手)로 만들어져 인간보다 작고 가벼워요. 하지만 어느 날 경주 중 '하늘이 너무 파래서' 낙마하며 골반 아래가 망가져 폐기될 운명에 처합니다.
콜리와 파트너였던 말의 이름은 '투데이'입니다. 한때 에이스였던 투데이의 관절에 문제가 생기자, 경주마로서의 가치를 잃었다며 목숨을 앗아가려 합니다.
이 둘의 보호자가 된 건 우은혜와 우연재 자매인데요. 은혜는 어렸을 때 소아마비로 거동이 불편하게 됐고, 연재는 그런 은혜를 배려하느라 갖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참으며 자란 동생입니다.
그다지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투데이와 정서적 교감을 하던 은혜와 로봇에 관심 많아 모든 돈을 털어 콜리를 수리한 연재는 좋은 파트너가 되어 투데이와 콜리를 지키려 합니다.
두 미성년자는 어떻게 어른들에 맞서 사랑하는 로봇과 말을 지킬 수 있을까요? 아니, 과연 지키는 데 성공할 수 있을까요?
캐릭터들이 살아 숨쉬는 것 같아요. 은혜와 연재 자매도, 그들의 엄마인 보경도, 투데이도, 심지어는 숨을 쉬지 않는 로봇인 콜리까지도요.
각자의 상처가 왜 생겼는지, 어떻게 이겨내고 극복해 나아가는지를 섬세한 심리 묘사를 통해 풀어내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책을 읽다보면 모든 캐릭터를 사랑하게 됩니다.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에 집중하게 되고 애틋해지잖아요.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그렇게 됩니다.
작가는 원래 한국과학문학상에 다른 작품을 응모하려고 했대요. 그런데 그 소설 속 인물들이 ‘가짜’ 같다는 느낌에 ‘내가 잘 쓸 수’ 있는 소설을 새로 썼고, 그게 <천 개의 파랑>이었대요. 공들인만큼 캐릭터 하나하나가 입체적으로 느껴졌어요.
소박한 아름다움을 담고 있는 표현과 문장들이 많아요. 사회적 메시지를 담아 여운을 길게 남기는 문장들도 많고요. 인문학도 특, SF에서도 실용서에서도 자꾸 좋은 문장들을 수집해요.
그리운 시절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현재에서 행복함을 느끼는 거야. 행복한 순간만이 유일하게 그리움을 이기거든.
아주 느리게 하루의 행복을 쌓아가다 보면 현재의 시간이, 언젠가 멈춘 시간을 아주 천천히 흐리게 할 거예요.
위 문장들이 아름다운 표현들이라면,
다리를 고치고 싶다는 건 아니야. 물론 고치게 된다면 좋겠지.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해서 불행하지는 않아. 꼭 같을 필요는 없잖아.
다리는 형체죠. 진정으로 가지고 싶은 건 자유로움이에요. 가고자 한다면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유요.
위 문장들은 신체적 장애가 있는 은혜가 로봇 기술로 발전한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에요. 기술의 필요성과 방향성을 고민하게 만드는 문장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천 개의 파랑>은 로봇의 눈으로 인간 세상으로 바라봄으로써 파란 하늘, 산들 바람, 여름의 가로수, 울긋불긋한 단풍처럼 익숙한 것들을 생소하면서 특별한 것들로 느껴지게 합니다.
동시에 과학 기술이 향해야 할 곳은 권력 쟁취나 경제적 번영이 아닌,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이 없게 하는 게 아닐까, 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니지, 아쉽다기보다는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부분인데요. SF를 어떤 목적으로 읽냐에 따라 다를 것 같아요.
‘S(cience)’ 강조형: 첨단 기술로 만들어 낸 화려한 상상의 세계를 보고 싶은 타입
‘F(iction)’ 강조형: SF도 소설이니, 첨단 기술이 소재인 좋은 이야기를 읽고 싶은 타입
<천 개의 파랑>은 후자를 위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설의 배경은 로봇이 상용화된 시대지만, 이야기의 주 무대가 경마장이기도 하고, 주인공 가족이 기술의 혜택과는 멀리 있는 사람들이라, 새로운 지식을 얻거나 상상력에 놀라거나 하진 않았어요.
하지만 우리의 미래엔 과학기술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사회 발전은 속력만큼이나 방향이 중요하니까요.
- 기후 위기가 악화되지 않는 것,
- 자연 환경을 보호하는 것,
- 반려동물만이 아닌 모든 동물과 상생하는 것,
- 차별과 소외를 줄이는 것,
- 미래에도 지구에 사는 인류가 지켜야 할 불변의 가치들이 있으니까요. <천 개의 파랑>은 그런 면에서 아주 따뜻한 온도의 인문학적인 SF라고 생각합니다.
직전의 책 리뷰가 장강명 작가님의 <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이었는데요, 연속으로 SF를 읽으니 두 작품이 확연히 비교되더라고요.
좋고 나쁘고가 아니라,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SF에서 S(과학)가 더 중요하다면 <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을, F(소설)가 더 중요하다면 <천 개의 파랑>을 추천해드리고 싶어요. 개인적으로는 호흡이 길고 흡인력 있는 소설을 좋아하기에 <천 개의 파랑>이 더 큰 울림을 가져왔습니다.
아, 그리고 제목의 의미는요. 콜리가 아는 단어가 천 개인데요, 그중에서도 하늘을 보며 ‘파랑’을 자주 이야기해요. 파랑이 다 같은 파랑이 아니듯, 콜리에겐 모든 단어가 저마다의 사연이 있었어요. 정말 순수하고 낭만적인 로봇 아닌가요?
<천 개의 파랑>을 재밌게 읽은지라 작가의 다른 작품도 찾아봤고, 밀리 오리지널로 발표한 단편 소설이 있길래 바로 읽었습니다.
제목은 <뼈의 기록>으로, 작가가 스스로 정한 '로봇 3부작'의 마지막 시리즈 소설이라고 해요. <천 개의 파랑>이 첫 번째고, <뼈의 기록>이 마지막이에요.
<뼈의 기록>의 주인공 로봇의 이름은 '로비스'입니다. 로비스는 장의사예요. 영안실에서 시체를 정성스럽게 정돈하고, 유가족이 없다면 이승에서의 마지막까지 함께합니다.
<뼈의 기록>은
- 로비스가 만난 망자와 유가족들과의 에피소드,
- 영안실에서 청소부로 일하는 친구 '모미'와의 일상과 이별
을 담은 소설입니다.
아무래도 <천 개의 파랑>을 읽고 바로 <뼈의 기록>을 읽었기에 두 작품을 비교하게 되는데, 인상적이었던 점은 아래 두 가지입니다.
1. 단편인데 스케일은 더 크다.
2. 상황이나 심리 묘사는 담백한데 문장은 순수하고 아름답다.
더 자세히 얘기해보겠습니다.
저는 오로지 이 영안실 안에서 움직이도록 만들어진 개체로, 건전지로 움직이며 내구성이 약해 1미터 이상의 높이에서 뛰어내리거나 100도 이상의 고온에서는 부품이 망가집니다.
로비스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는데, 그래서 그의 동선과 일상은 매일 같아요. 그렇게 살아가도록 설계되었기에 로비스는 지루함도, 불만도 느끼지 않아요.
그런데 소설의 무대는 영안실에 한정되지 않아요. 로비스는 친구였던 모미가 숨을 거두자, 모미가 젊었을 때의 화상 사고로 뜨거움을 극도로 싫어한다는 걸 기억하고 화장 대신 모미가 원하던대로 우주에서 영원히 떠돌 수 있도록 시체를 데리고 영안실에서의 탈출을 감행합니다.
인간이 로비스에게 그 판단에 대한 이유를 묻자 이렇게 대답해요.
거부할 수가 없어서. 몸은, 거부할 수가 없으니까. 마음이 시키면.
친구였던 인간을 위하려는 마음을 따라 설계된 프로그램의 명령을 어기는 로봇이라니, 너무 흥미롭지 않나요?
'주체적'인 로비스 덕에 소설은 영안실에서 무한한 우주로 무대를 옮깁니다.
모미의 몸이 조금씩 우주선 밖으로, 끝이 없는 공간으로, 멈춰 세우지 않는 한 무한히 흘러가는 저 아득한 곳으로 나아갔다.
현실적인 죽음의 공간인 영안실, 그리고 달이 가장 잘 보이는 공간에 멈춰 있는 우주선은 서로 상반된 이미지를 전달하며 연고자 없이 죽음을 맞이한 모미의 마지막을 쓸쓸함이 아닌 몽환적인 순간으로 연출합니다.
로비스는 영안실에 누워 있는 모든 시체에게 염을 하기 전 이렇게 말을 건네요.
고인의 마지막 길, 생전의 모습으로 가실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죽음에 대해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죽음의 조의를 돌아간다고 표현했다. 이곳에 오기 전에 먼저 머물렀던 그곳으로.
인간들은 믿는다. 당연히 그곳에서 다시 만나리라. 그것이 죽음일까. 공간을 옮기는 것, 소멸이 아닌 돌아가는 것.
저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어요. 신경을 안 써서가 아니라, 막연한 두려움 때문인데요. 이 세상에 더이상 존재할 수 없는 것도 무섭고, 사고가 멈추는 것도 무섭고, 그 다음엔 아무것도 없을까봐 무서워요. 그래서 일부러 생각을 안하려고 했어요.
그러데 요즘은 생각이 조금씩 바뀌고 있어요. 누구의 죽음도 원하는 타이밍에 찾아오지 않기에, 또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결말이기에, 삶의 마무리에 대해 차분히 생각하며 현재의 시간을 성실히 살아가고 싶어요. 물론 아직은 용기가 안 나 '싶어요' 라고만 썼습니다.
<뼈의 기록>은 인간의 죽음 그 이후에 대해 다루는데, 로봇의 눈으로 이를 바라보기에 슬프기보단 고요한 분위기예요.
로비스는 정성스러운 손짓으로 시체를 닦고, 수의를 입히고, 머리를 빗겨요. 이 모든 과정을 '배웅'이라고 표현합니다. 꼭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갈 존재인 것처럼요.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평온해집니다.
죽음이란 모두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모두에게 다르며, 볼 수 없는 존재의 삶을 끊임없이 보고 있는 뼈의 아름다움과 같은 것이로구나.
로비스가 깨달은 죽음의 의미입니다. 소설의 제목과도 연결되는 부분인데요. 뼈는 인간이 생을 다할 때까지 성장하고 변형된대요. 겉으로 보이진 않지만 모두의 뼈는 고유하고, 각각의 삶 전체를 간직하고 있어요.
즉, 모두의 삶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소중한 시간의 집합인 거죠. 그래서 그의 결말인 죽음 역시도 고귀하고요.
인공지능 로봇에게 권리나 감정 따위가 있느냐고 묻는 것은 현재 저에게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보다 따뜻하거나 인간 같은 로봇을 그리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요!
작가는 책 소개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마 많은 독자가 의문을 가지고 있는 부분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솔직히 이야기한 듯 합니다.
담백하게, 그러나 모호하지 않게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는 모습이 독자로서 감사했습니다. 동시에 그와는 별개로, 저 역시도 감성적인 로봇에 대한 물음표가 떠오르긴 하더라고요.
- 인지나 학습능력이 뛰어난 로봇은 인간의 뇌처럼 주체적인 사고를 할 수 있게 될까?
- 그렇다면 프로그래밍된 것 외에 얼마만큼의 적극성을 발휘할 수 있을까?
- 로비스처럼 인간과 로봇이 친구가 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반대로 적이 된다면 재앙을 당할 수도 있을텐데?
- 종합해보면, 사실 인공지능 로봇이 감정을 가질 수 있냐없냐는 꽤 중요한 문제 아닐까?
이런 질문들이 머릿속을 돌아다니는데, 로봇 전문가를 붙들고 하나하나 답을 듣고 싶은 마음입니다.
아무튼, 뼛속까지 인문학도인 독자 1인으로서 과학기술, 특히 로봇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볼 수 있어 시야가 넓어진 기분입니다.
밀리의 서재 이용자라면 누구나 하루이틀 만에 읽을 수 있으니, <뼈의 기록>도 <천 개의 파랑>과 함께 추천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