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좋아하는 하루키 소설이 생겼다

무라카미 하루키 신간,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리뷰

by 이재인

드디어 찾았습니다. 취향저격의 하루키 소설을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간 -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 소식에 서점마다 예약 주문이 폭발했다는데요. 저 역시 그 줄에 서 있었습니다.


9월 7일에 책을 받아 내내 붙들고 있었습니다. 700페이지가 넘는 장편 소설인데, 엄청 빠져들어 끝까지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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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작품, 좋아하시나요?

좋아합니다. 그의 에세이집은 여러 권 사놓고 생각날 때마다 꺼내봐요.


그러면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좋아하시나요?

얼마 전까지는 글쎄요, 였는데요. 이제는 '네'까지는 아니어도 '좋아하는 소설이 있긴 해요'라고 대답할 수 있어요.


어떤 내용이냐면,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정체성에 대한 혼란으로 열일곱 살 이후 쭉 불완전한 인생을 살아온 40대 남성이 주인공(나)입니다.


불완전성은 그가 한 살 아래의 여고생을 만나며 시작됐어요. 소녀는 이 세계의 본인은 '진짜'가 아니라며,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 안이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라 거듭 말합니다. 어느새 둘은 그 도시를 의식 속에서 함께 만들어갑니다.


어느날 소녀는 흔적도 없이 갑자기 사라집니다. 주인공은 공허한 마음으로 살아가다 40대가 됩니다. 그러다 어느날 밤, 미지의 도시로 이동합니다.


도시는 둘이 설계했던 대로 생겼고, 그외의 것은 존재하지 않아요. 감정도, 욕망도 없는 이곳에서 주인공과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소녀는 재회해요.


고요한 호수같기만 한 이 소(小)세계에서 주인공만 어지럽습니다. 40년 넘게 살아온 세계가 진짜인지,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가 진짜인지, 어느 곳에 존재하는 자신이 진짜인지.


여기까지가 1부입니다.


그러다 또 원래의 세계로 돌아옵니다. 영문도 모르는 채 주인공의 육체와 영혼은 두 세계를 넘나듭니다. 그는 마음속 혼란을 다스리고자 직장을 그만두고 작은 마을로 삶의 터전을 옮깁니다.


그의 새로운 일터인 마을 도서관은 어쩐지 의식 속의 도시와 연결된 공간처럼 느껴집니다. 이미 죽은 이가 혼령으로 나타나고, 그 도시에 대한 꿈을 자주 꾸고, 심지어 그 도시에 가고 싶다는 소년을 만납니다.


동시에 도서관 일에도 정을 붙여 최선을 다하고, 도서관 사서나 동네 카페 주인 등 새로운 사람과 관계를 맺습니다.


여기까지가 2부입니다.


3부는 분량이 짧은데, 다시 의식 속 도시로 무대를 옮겨 주인공이 결국 어느 세계에 남게 될지를 보여줍니다.


평생 마음에 품었던 소녀를 따라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 남을지, 태어나서 공부하고 일하고 평범하게 나이 들어가던 세계로 돌아올지. 주인공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좋았던 점 하나,

주인공이 스스로 던지는 질문에 나만의 대답을 고민하게 돼요.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인문학적, 혹은 철학적 사유로 가득해요. 주인공은 현세와 의식 속 도시를 오가며 마음의 어지러움을 잠재우기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요.


나라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어째서 이곳에 있고, 이런 일을 하고 있을까?


내가 기억하는 것의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부터가 허구일까? 어디까지가 실제로 있었던 일이고 어디부터가 가짜일까?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인가?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추론인가?


저는, 그리고 우리는 발을 딛고 있는 이 세계에만 평생을 살아왔지만 가끔 내 존재를 제 3자의 눈으로 바라볼 때가 있지 않나요?


영화 <트루먼 쇼>처럼 잘 꾸며진 무대에서 연출된 말과 행동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노력과는 상관없이 미리 정해진대로 인생이 흘러가는 것 같기도 하고, 멀티버스처럼 다른 차원에도 내가 숨쉬고 있을 것 같고.


그러다보면 존재론적인 질문들을 마구 떠올리는데,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이런 광범위한 질문에까지 의식이 가닿기도 해요.


탄생도, 죽음도 내 선택이 아니었는데 그 사이의 삶은 내 선택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게 맞나, 싶고요.


삶 자체에 감사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나의 존재에 대한 의문은 한번 파고 들면 끝이 없습니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의 주인공도 이런 질문을 끊임없이 하는데, 모호하고 흐릿한 생각들 사이에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만들어 내 질문에 대한 답이 구체적인 형상을 갖게 되는 듯 합니다.


힘없이 허공에 떠다니던 생각들에 조금 힘이 붙는 느낌이랄까.


좋았던 점 둘,

독립성과 주체성을 찾아가는 인물이 청소년도 청년도 아닌, 중년이에요.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의 주인공은 40대 중반의 남성이지만, 그의 시간은 소녀와 이별했던 열일곱에 멈춰 있어요. 대학을 가고, 취업을 하고, 몇 번의 연애를 하지만 마음은 항상 텅 비어 있어요.


어디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 채 이 세계 저 세계 떠돌던 그는 의식 속 도시의 모순을 발견하며, 현세의 작은 마을 도서관에서 일하며, 그 마을의 사람들과 조금씩 인연을 쌓으며 점점 자아를 인식해요.


당신의 마음은 하늘을 나는 새와 같습니다. 높은 벽도 당신 마음의 날갯짓을 막을 수 없습니다. (중략) 진심으로 믿으면 됩니다.


미지의 도시는 주인공이 소녀와 함께 어릴 적 의식 속에서 만들어 낸 곳입니다. 따라서 마음 먹기에 따라 높고 단단한 벽을 허물 수도, 넘을 수도 있어요. 주인공이 이를 깨닫고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이는 모습은 성장 소설의 한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찡...)


게다가 그 인물이 몇십년간 마음 속 빗장을 걸어둔 채 공허한 인생을 살아온 중년이니, 잔잔한 감동이 더 진하게 밀려옵니다.


단편적인 생각들을 덧붙이자면,


1. 다 좋은데 책 표지, 왜 영어 폰트가 제일 큰가요?

일본 작가의 한국어판 소설인데, 표지에 대문짝만하게 영어가 쓰여 있는 게 이상합니다... 심지어 제목도 아니고 작가 이름이 말예요. 왜일까...?


2. 지루해도 한 시간만 참고 읽어보세요.

첫 부분은 조금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데, 100페이지까지만 읽으면 금세 속도가 붙습니다. 1부 초반은 거친 산길을 오르는 것 같은데, 그 이후는 내리막길을 뛰는 것 같은 속도감이 느껴져요!


3. 음식과 음악 이야기가 조금이나마 나와서 반가웠습니다.

하루키 작품에 빠지면 서운한 거 두 가지를 꼽자면, 음식(특히 맥주나 와인)과 음악(특히 재즈)인데요. 중반까지 먹는 얘기가 안 나와서 약간 섭섭할 뻔 했는데, 작은 마을로 터전을 옮기며 짧지만 파스타와 와인, 그리고 재즈를 언급합니다.


마무리하며,

해리포터 덕후들 계십니까?


7편 '죽음의 성물' 에 제가 정말 좋아하는 대사가 있는데요. 볼드모트에게 아브라카다브라(;;)를 맞은 해리가 의식 속에서 그려낸 킹스크로스 역에서 덤블도어를 만나며 나누는 대화입니다.


당연히 네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이지, 해리. 하지만 그렇다고 이게 진짜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눈에 보이는 것만, 실제로 경험한 것만 진짜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내가 믿는 것, 내가 옳다고 믿는 것, 그를 토대로 만들어 낸 나만의 소세계는 의미 없는 허구일까요? 또, 이 세계에서의 삶이 끝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까요?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속의 인물들이 현세만큼이나 의식 속 세계를 진짜라고 믿고 소중히 여긴 것처럼,


해리가 머릿속으로 만들어낸 킹스크로스 역에서 덤블도어와 대화하고 다시 싸울 용기를 얻은 것처럼,


나만의 의식과 무의식이 때론 현세의 몸과 마음을 움직이게 해요. 이런 관점에서는 무엇이 진짜인지보다 무엇을 내가 진짜라고 믿는지가 중요한 것 같아요.


이렇게 길고 긴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의 리뷰를 마칩니다.


철학적 사유를 즐기는 분, 차분하고 유려하게 흐르는 소설 좋아하시는 분, 그리고 당모 무라카미 하루키 팬들에게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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