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원의 몸에 사람의 영혼이 들어간다면?

정유정표 판타지 장편 소설, <진이, 지니> 리뷰

by 이재인

지난주 내내 회사 일이 바빠 주말에도 일을 했고, 그래서 책 읽을 시간이 부족했는데요.


운동하거나 이동하는 시간을 활용하자 싶어 밀리의서재 오디오북 분야를 유영하던 중, 엄청 좋아하는 정유정 작가님의 작품을 발견했습니다.


제목은 <진이, 지니>입니다. 장르는 정유정 작가의 시그니처인 공포스릴러가 아닌, 판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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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나는 이 소설을 죽음 앞에 선 한 인간의 선택에 관한 이야기이자, 삶의 마지막 희망을 찾아 떠나는 모험 이야기로 만들고 싶었다.

저자는 '작가의 말'에서 <진이, 지니>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주인공은 제목에 쓰여있듯 영장류 연구자인 인간 '진이'와 보노보인 '지니'입니다. 보노보는 DNA가 인간과 98.7% 일치하는, 인간과 가장 유사한 유인원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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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둘이 보노보, 오른쪽 둘이 침팬지래요. 침팬지에 비해 직립보행에 더 유리한 체형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니는 여아이니, 가장 왼쪽 보노보와 비슷하지만 조금 더 어리게 생겼겠어요.


이 책의 주요 사건은 진이와 지니가 함께 큰 교통사고를 당하며 시작합니다. 진이는 지니를 구조해 영장류 센터로 돌아가는 길이었어요. 둘은 차 앞유리를 뚫고 튕겨져 나가는데, 이때 인간 진이의 영혼이 보노보 지니의 몸으로 들어가요.


진이는 당연히 자신의 몸으로 돌아가려 하고, 이를 위해 지니의 몸을 빌려 엄청난 모험을 하게 돼요. 긴 여정의 조력자는 서른이 되도록 취업을 못했다는 이유로 집에서 쫓겨난 '민주'라는 남자입니다. 진이는 인간이었을 적(!) 몇 번 마주친 인연을 동아줄 삼아 민주에게 접근하고, 민주는 마음이 약해져 적극적으로 도와주게 됩니다.


모험이 계속될수록 진이는 절망의 수렁으로 빠져요. 병원에 있는 자신의 몸은 숨을 쉬고 있는 게 기적일 정도로 만신창이가 됐고, 지니의 의식과 무의식에 점점 동화되거든요.


알고 보니 지니는 밀림에서 가족과 살다가 밀렵꾼에게 포획되어 한국에 오게 됐고, 학대당하며 춤추고 노래하는 훈련을 받고 있었어요. 진이가 구조하러 오기 전까지 지니는 인간에게 본래의 삶을 빼앗겼던 거죠.


진이는 자신의 몸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지만, 돌아가자마자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아요.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그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느낀 점

주요 캐릭터 셋 - 진이, 지니, 민주 - 은 서로 다른 깨달음을 전달해 주는데요. 제가 느낀 점과 함께 한 명씩 집중 조명해 보겠습니다.


1) 인간 이진이

- 방관자가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방법은 피해자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이다.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엔 항상 방관자가 있죠. 선한 방관자는 용기가 부족해 피해자 편에 서지 못했다는 이유로 오래 괴로워하기도 합니다. 진이도 과거에 불법 감금된 보노보를 구하지 못한 기억에 매여 삽니다. 벗어나려면 같은 상황을 마주했을 때 과거와는 반대로 행동하면 됩니다.


도움이 필요한 존재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거죠. 나보다 약한 존재에게 필요하다면 바람막이가 되어주고요. 진이가 그렇게 하더라고요!


- 죽음의 존재를 인정하면 삶은 매 순간 소중해진다

진이는 유일한 가족이었던 엄마를 병으로 잃어요. 이후 그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아예 차단했습니다.

홍해파리처럼 영원이 살 것도 아니건만, 내일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하지만 외면한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진이의 삶은 어딘가 시니컬하고, 무기력한 구석이 있어요. 교통사고로 죽음의 위기를 맞게 되자 그제야 깨달아요. 죽음이 있기에 삶이 빛날 수 있다는 걸요.

삶의 한가운데에 죽음이 있다는 걸 인정했더라면, 나와 작별하는 법을 미리 배웠더라면, 지금의 나는 좀 달랐을까.


물론 죽음 앞에서 어느 존재가 의연해지겠냐마는, 죽음을 금기시하는 건 오히려 사는 동안 불안을 증폭시키는 것 같습니다.


2) 보노보 지니

- 인간의 삶이 각박해져도 인간이 아닌 존재와의 공생을 잊지 말자

지니는 궁지에 몰렸을 때 가장 행복했던 기억을 무의식적으로 떠올려요. 새근새근 자는 동생을 바라본 순간들인데요.


동생을 위해서라면 비를 뚫고 열매와 꽃을 잔뜩 따오고,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까꿍' 놀이를 수없이 반복할 수 있어요.


소소한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어요. 지니는 이유도 모른 채 인간에게 붙잡혀 배를 타고 한국에 왔으니까요.


인간은 무슨 권리로 동물의 삶을 제멋대로 흔드는 걸까요. 동물은 동물대로, 인간은 인간대로 공존하면 될 텐데요.


사진이나 영상을 보고 예쁘다고, 귀엽다고 감탄하면서 동물 애호가라고 말할 순 없죠. 이런저런 사연이 얽혀 있어도 동물원이나 수족관은 인간중심적인 사고에서 만들어진 시설이라 생각해요. 이를 그냥 두고 보는 저 역시도 방관자겠지만, 소설을 읽는 동안 입 안이 씁쓸해지더라고요.


3) 인간 김민주

- 선의로 타인을 도와주는 건 때로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민주는 주인공이라고 할 순 없지만 가장 감정이입이 되는 인물이에요. 인간의 영혼이 깃든 보노보를 마주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못 믿겠고, 황당하고, 나를 공격할까 봐 무섭고 그렇잖아요? 그 보노보가 심지어 도움을 청한다니, 불쌍해서라도 민주에게 정이 갑니다.


그런데 민주는 피하지 않아요. 그는 집에서도, 사회에서도 인정받지 못해 자기혐오가 심했어요. 그런데 이를 타인에게 분노로 표출하지 않고, 오히려 도움을 요청한 타인에게 응해요.


돈도, 기댈 곳도 없는 민주가 오로지 진이와 지니를 돕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감동을 줍니다. 이 과정에서 민주가 열심히 살아갈 용기와 자신감을 얻게 되는 것도 좋았어요.


내가 마음의 여유가 없어 남을 도울 수 없다는 게 보통의 사고방식이잖아요. 그런데 책에서라도 반대의 가능성을 열어놓으니 인류애를 간접적으로나마 느낍니다.



마무리하며

오늘도 자유로운 사담으로 책 리뷰를 마무리하려는데요, 책을 읽는 동안 산발적으로 떠오른 생각을 늘어놓아봅니다.


1. 정유정표 판타지, 더 보고 싶다

그간 정유정 작가님은 공포스릴러물의 대가로만 알고 있었는데, 판타지 소설도 참 재밌었어요! 특유의 날카롭고 자세한 심리묘사, 박진감 넘치는 전개는 장르를 타지 않더라고요.


<진이, 지니>는 인간의 영혼이 보노보에 들어갔다는 설정 외에는 판타지 요소가 없었는데, 언젠가 본격적인 정유정표 판타지 소설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 실천으로 옮길 수 있게 선함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자

저는 소설 리뷰를 자주 하는데요. 소설은 보통 작가가 전달하고 싶은 주제가 뚜렷하기에 이에 대해 느낀 점을 쓰다 보면 진지해지고, 착해지고, 정의로워집니다.


매일 착한 척을 하다 보면 진짜 착해진다고 하잖아요. 현실에 두 발을 딛고 살다 보면 자꾸만 냉소적으로 변하는데, 책으로라도 올바른 가치관을 계속 되뇌고 싶은 마음입니다.


3. 내 침대의 오랑우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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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의 시작과 끝을 함께하는 제 침대 위 인형들인데요.


어제 이후로 오랑우탄 인형만 보면 아련해져요...

더 무기력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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