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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인 Dec 10. 2023

미국인이 사랑하는 아이스하키 경기 관람기

2023년 10월 8일

만년 재택근무자라 일하는 시간이나 공간에 큰 제약이 없다. 집에서 일하다 지루해지면 카페나 공유오피스에 다녀오고, 그마저도 반복되어 지루해지면 여행을 간다. 미리 계획하지 않는 여행은 보통 혼자다. 혼자 시간 보내는 걸 워낙 좋아해 여행 가서도 심심하다거나 무섭다거나 한 적은 없다. 


혼자 여행은 편안하다. 내가 하고 싶은 걸 아무 때나 하면 된다. 하루종일 빵만 먹고 싶을 때도, 두 시간 이상의 거리인데 걷고 싶을 때도, 카페에서 몇 시간 내내 글을 쓰고 싶을 때도 그렇게 하면 된다. 동시에, 하기 싫은 건 고민조차 안 해도 된다. 유명한 맛집이라도 기다리는 줄이 길면 미련 없이 옆집을 가도 되고, 너무 사람 많은 관광 포인트는 과감히 포기해도 되고, 추운 날씨엔 실내에서만 돌아다녀도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양날의 검처럼 혼자 여행의 단점은 익숙한 방향대로 몸이 움직인다는 거다. 원래의 일상을 장소만 바꿔 경험할 때도 있다. 물론 장소의 변화에서 오는 새로움도 충분히 기분이 전환되지만, 낯선 도전을 할 때보단 시야의 확장이 덜하다. 


이번 시카고 여행은 혼자라면 못했을 경험들이 추억으로 남았다. 한 달간 유학생 친구 H의 원룸에서 묵었고, 첫 일주일은 또 다른 친구 J까지 합류해 같이 시카고 곳곳을 돌아다녔다. H와 J 모두 외향적인 성격이라 공연이나 스포츠 경기 보는 걸 아주 좋아한다. 나는 낯도 많이 가리는 데다, 사람이 많거나 밀폐된 공간을 안 좋아한다. 그래서 미국여행을 계획할 때도 운동 경기를 직관하러 갈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왜냐면 한국에서도 운동 경기는 방송으로만 봤기 때문에. 


J가 하키를 보러 가지 않겠냐고 물었을 때 '아무나 볼 수 있어?'가 첫 번째 질문이었고 '하키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는데 괜찮나?'가 두 번째 질문이었다. 친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당연하지'라고 한 번에 대답했다. 여행은, 특히 친구와의 여행은 익숙하지 않은 것에도 선뜻 도전할 힘을 준다. 그렇게 이 친구와 건축 투어에도 참여하고 뮤지컬도 보러 갔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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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셔널 하키 리그(National Hockey League), 줄여서 NHL은 MLB(야구), NFL(풋볼), NBA(농구)와 더불어 미국인들이 사랑하는 스포츠 리그다. 시카고를 여행하며 펍이든 일반 식당이든 심지어 일부 카페든 텔레비전이 설치되어 있는 곳엔 열이면 여덟은 스포츠 방송을 틀어놓은 걸 봤다. 같은 화면을 보며 같은 텐션으로 떠드는 현지인들 사이에 있을 때 유난히 여행자라는 게 실감 났다. 그러니까 대관한 게 아니고, 이곳의 모두가 스포츠 경기에 진심이란 거잖아. 미국 드라마에서 본 것도 같아. 종이 박스에 담긴 퓨전 중국 음식 먹으면서 야구든 풋볼이든 텔레비전으로 경기 보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콕 집어서 하키 경기를 보러 가기로 한 건 제일 생소한 종목이어서다. NHL은 미국과 캐나다의 프로 아이스하키 리그인데, 총 32개의 팀으로 구성되어 있다. 매년 9월에 시즌을 개막해서 다음 해 6월에 우승팀을 가린다. 내가 시카고에 간 건 10월이니 리그 시작 후 경기가 한창이었다. 32개의 팀 중 하나의 연고지가 시카고고, 유나이티드 센터라는 엄청 큰 경기장도 있단다. 이걸 안 이상 안 보러 갈 수가 없지. 한 사람당 45달러씩 내고 2층 좌석을 예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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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는 저녁 7시였고, 그전엔 친구와 다운타운을 돌아다녔다. 네이비 피어(Navy Pier)라는 유원지에 구경 가 관람차나 회전목마 등의 놀이기구를 한참 구경했다. 미시간 호가 바로 옆이라 항구 도시처럼 정차되어 있는 보트도 잔뜩 보고, 비둘기보다 갈매기들을 많이 피해 다녔다. 


한적하지만 낭만적이었던 네이비 피어


다음 행선지는 세상에서 제일 큰 스타벅스였다. 스타벅스의 시작은 시애틀이지만 가장 큰 매장은 시카고에 있다. 로스터리까지 하는 리저브 매장은 전 세계에 여섯 곳뿐이다. 시카고의 리저브 로스터리는 일반 매장까지 통틀어 세게에서 가장 크다. 루프탑을 제외하면 4층짜리 건물이다. 


세상에서 제일 큰 스타벅스 들어가기 1분 전


1층엔 커다란 로스팅 기계가 돌아가고 있었고, 2층엔 빵집 하나를 옮겨온 것처럼 다양한 빵들이 진열장 안에 차곡차곡 정리돼 있었다. 친구와 아몬드 크루아상 하나와 올리브오일 케이크를 골랐다. 음료는 디카페인 원두로 내린 아메리카노와 에스프레소 두 잔 세트를 주문했다. 제일 특이했던 올리브오일 케이크는 미끌거리는 파운드케이크 식감이었는데, 커피 없이는 못 먹을 뻔했다. 그러다 여섯 시가 됐고, 허겁지겁 리프트(우버와 비슷한 승차 공유 서비스)를 불러 유나이티드 센터로 이동했다. 


희한한 맛이었던 올리브오일 케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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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나이티드 센터는 2만3천명 정도 수용할 수 있는 경기장이다. 대학교 다닐 때 목동에 있는 실내빙상장으로 하키 경기를 몇 번 보러 간 적 있다. 그곳의 수용 인원은 약 5천명이니 유나이티드 센터를 처음 보곤 규모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경기장 앞에 빼곡히 주차되어 있는 차들에 기가 눌렸다. 


유나이티드 센터 외관


이날은 시카고 블랙호크스(Chicago Black hawks)와 디트로이트 레드윙스(Detroit Red wings)의 경기였다. 홈구장에서의 경기다 보니 방문객은 모두 시카고 블랙호크스 유니폼 차림이었다. 빨갛고 까만 옷들 사이 유일하게 평상복을 입은 어리바리한 표정의 동양인 둘. 아무것도 모르는데 주변의 열기에 기분이 점점 좋아졌다. 


가방은 경기장에서 한참 떨어져 있는 트럭에 맡겨야 했다. 가지고 들어갈 수 있는 건 휴대폰, 여권, 그리고 지갑뿐이었다. 입구에서 소지품 검사를 엄격하게 하길래 잘못한 것도 없는데 경호원들의 눈을 피했다. 로비는 경기 30분 전부터 엄청 북적였다.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방문객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많았다. 


우리의 자리는 2층 맨 앞이라 시야를 가리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혹시 있다 해도 여러 개의 커다란 전광판이 경기장 곳곳을 보여주기에 괜찮다. 경기는 미국 국가를 부르는 것으로 시작을 알렸다. 하키는 20분짜리 3개의 피리어드(period)로 구성된다. 각 피리어드 사이엔 15분의 쉬는 시간이 있다. 축구나 농구와 달리 각 팀의 인원 수가 실시간으로 달라진다. 체력 소모가 큰 스포츠라 선수들이 들고 나는 게 전략의 일부란다. 정신없고 에너제틱했다. 


미국 국가로 시작하는 하키 경기


경기만 하는 게 아니라 중간중간 관객과 함께하는 이벤트가 진행됐다. 퀴즈 맞히기나 노래에 맞춰 춤추기 등의 이벤트 시간이 길어 두 시간 넘게 지루한 줄 몰랐다. 골을 넣을 때마다 전광판에 사방의 효과음과 관객의 응원소리로 귀가 먹먹했다. 시카고 블랙호크스가 골을 넣으면 'Let's go Black hawks'가 울려 퍼지고, 디트로이트 레드윙스가 골을 넣으면 'Detroit sucks'가 경기장을 뒤흔들었다. 


골이 들어갈 때마다 경기장이 부서지는 줄 알았다


결과는 4:2로 블랙호크스의 승리였다. 홈구장의 힘을 받은 게 분명하다. 경기장이 온통 붉은색으로 물결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시카고 블랙호크스의 승리를 축하하는 화면


집에 오는 길은 험난했다. 우버를 잡는데도 시간이 한참 걸렸고, 나중에 계산된 걸 보니 거의 10만원을 내고 탄 셈이었다. 그런데 다음에도 기회가 있다면 밥을 한두 끼 포기해서라도 경기를 또 보러 올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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