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재인 Dec 24. 2023

낮엔 동네에서 놀고 저녁엔 일하는 이상한 여행자

2023년 10월 12일

아침에 눈을 떠 시계를 보니 여덟 시였다. 평소 같으면 이미 일어나서 아침도 먹고 씻고 산책을 하든 책을 읽든 뭐라도 하고 남았을 시간인데, 전날 새벽 2시까지 일한 게 아무래도 무리였나 보다. 거진 여섯 시간을 잤는데도 개운하지 않고 몸이 찌뿌둥한 걸 보면.


친구는 아침 수업이 있는 날이라 이미 나갈 준비까지 마쳤다. 잠귀가 엄청 밝은 나인데, 친구가 씻고 도시락 싸고 짐을 다 챙길 때까지 아무것도 못 들었다니 신기하군. 커피 머신으로 에스프레소 삿을 뽑으며 친구가 물었다. 오늘은 낮에 뭐 할 거냐고.


"글쎄, 별 계획 없어. 그냥 에반스톤 안에서 여유롭게 돌아다닐까 봐."

"그래? 이따 같이 점심 먹을까? 그 타겟(target, 동네 마트) 옆에 버거집. 저번에 가봤는데 맛있던데?"

"엉. 완전 좋아."


친구가 나간 후 가볍게 청소를 했다. 창문을 연 뒤 이부자리를 개켜놓고, 청소기를 밀고, 침대 밑에 밀어 넣은 캐리어를 꺼내 다시 옷과 짐을 차곡차곡 정리하고, 며칠간 쌓인 빨래를 돌렸다. 문득 한 달 동안 원룸에서 묵을 수 있게 해 준 친구가 너무 고마웠다. 미국 MBA는 입학하자마자 학업과 취업을 병행해야 하는 스케줄이라 일반 학생은 물론 취업준비생보다도 바쁘다. 한창 예민할 시기일 텐데 미국여행을 망설이는 나에게 선뜻 자기 방에서 지내면 된다고 해줬다. 내가 아는 이 친구는 빈말 안 한다. (아닌가...? 읽고 있다면 말해줘 친구야...) 어쨌든, 서로가 있어서 바쁘고 힘든 시기가 고달프지 않았다고, 여행의 막바지까지 거듭 이야기했더랬다.


올해 초여름까진 논현동에서 2년 반을 동고동락했던 사이라 원룸에서 둘이 지내는 데도 나름 합이 잘 맞았다. 습관 어디 안 가는구나. 예를 들면, 친구는 청소를 잘하는데 물건은 어지러이 늘어놓는다. 특히 모서리에 아슬아슬하게 걸쳐놓는 게 특기다. 그걸 안정적인 자리로 정렬하는 건 나다. 설거지나 빨래도 곧잘 하는 편이다. 다만, 요리는 친구가 백 배 잘한다.


_

시카고엔 며칠 째 비가 온다. 그냥 오는 것도 아니고 건물 안에서도 육안으로 보일만큼 후드득 내리는데, 길에서 우산 쓴 사람은 나뿐이다. 어느 나라를 가도 비 오는 날 우리나라처럼 우산 많이 쓰는 사람이 없다. 웬만하면 그냥 맞는다. 옷이 방수가 되면 좋겠지만 안 되어도 어쩔 수 없다는 태도다. 어째서지. 머리카락이든 옷이든 젖었다가 마르면 그 쿰쿰함과 습기가 하루종일 따라다니는 것 같아 찝찝한데.


경량 우산을 쓰고 '콜렉티보 커피(Colectivo Coffee)'라는 동네 카페에 갔다. '동네'라 하면 시카고 다운타운에서 기차로 40분 정도 떨어져 있는 도시인 '에반스톤(Evanston)', 그 안에서도 노스웨스턴 대학교 근처를 의미한다. 대학이 한 도시에 있고, 도시 구성원 중 대학 관계자의 비율이 높으면 '칼리지 타운(College Town)'이라 부른다. 노스웨스턴 대학교가 중심인 이 동네도 너무나 칼리지 타운이다.


노스웨스턴 대학교의 상징색은 채도 높은 보라색이다. 학교 기념품숍엔 맨투맨과 후드티 등의 옷부터 각종 문구류와 소품들까지 보라색으로 가득하다. 학생들은 적극적으로 그걸 입고 쓴다. 에반스톤의 길거리를 걸을 때도, 카페나 식당을 가서도 보라색 무리는 꼭 눈에 들어온다. (심지어 주말까지도!) 대학에서 좀 멀리 떨어진 중고 옷가게에도 노스웨스턴 대학의 굿즈 코너가 따로 있는 걸 보고 생각했다. 이 동네, 보라색에 진심이네.


콜렉티보 커피에도 보라색 맨투맨을 입은 학생들 몇몇이 눈에 띄었다. 근데 칼리지 타운이라도 일반 시민들이 더 많긴 하다. 특히, 에반스톤은 시카고란 대도시와 가까운 데다 자연 풍경도 아름답고 분위기도 여유로운 편이라 고급 주택도 많다. 어린이와 노인도 자주 봤다. 아침에 카페에 오면 공부하거나 수다 떠는 학생들과 신문 읽는 노인들이 많다. 관광객은 거의 없다. 동양인도 잘 못 봤다.


몽롱한 상태로 드립 커피와 호박 스콘을 주문했다. 빵 부분은 담백하면서도 퍽퍽하진 않았다. 위의 아이싱 때문에 설탕이 자글자글 씹히는데, 커피에 약간 산미가 있어 그런대로 궁합이 괜찮았다. 카페 중앙의 긴 테이블엔 에너제틱한 학생들이 앉아 있길래 창가의 일인용 좌석에 자리 잡아 바깥의 행인들을 구경했다. 비도 그대로 왔고, 사람들도 우산을 안 쓴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블로그를 쓰다가, 전자책도 좀 읽다가 집중이 안 되면 멍하니 커피도 마셨다가를 반복했고, 그렇게 두 시간이 훌쩍 갔다. 친구 오전 수업이 끝날 시간이다. 밥 먹으러 가야지.



_

친구가 말한 버거집의 이름은 '에픽버거(EPIC BURGER)'였다. 자칭 '시카고 최고의 버거'라 소개하는데, 평일이고 주말이고 꽤 붐비는 걸 보면 어느 정도 사실인 듯싶다. 며칠 전, 다운타운에서 파이브가이즈를 방문해 모든 옵션을 추가한 '리틀 치즈버거'를 먹고 당분간 미국식 버거엔 학을 뗀 터라 눈에 들어오는 메뉴가 딱히 없었다. 그러다가, 커스터마이징이 가능한 'Build Your Own Burger(당신의 버거를 직접 고르세요)'라는 메뉴를 보고 이거다 싶었다. 빵 대신 양상추로 패티를 감싼 버거 아닌 버거를 주문했다. 적당한 굽기의 소고기 패티는 육즙이 가득해서 맛있었지만, 퐁신한 빵을 곁들인다면 더 맛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패스트푸드점에서 밀가루 없는 버거를 먹을 수 있다는 게 새롭고 속도 편안해 좋았다.



짧은 점심식사 후 친구는 학교로,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지난주에 온라인으로 주문한 것들이 친구집 건물 택배보관함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아서다. 그 나라의 온라인 몰에서 쇼핑하는 건 장기 여행자의 특권인 것 같아 별 건 아니지만 꼭 해보고 싶었다.


여러 브랜드 중 내가 눈독 들인 건 미국에서 세일 타이밍만 잘 맞추면 훨씬 저렴하다는 노스페이스와 파타고니아였다. 다행히 노스페이스 홈페이지에서 원하던 아이템을 저렴하게 살 수 있었다. 그건 바로 눕시 패딩 조끼와 써모볼 패딩 신발. 쌀쌀한 가을 날씨겠거니라고 생각한 시카고의 10월 날씨는 생각보다 추웠고, 가뜩이나 추위에 약한 나에겐 초겨울 날씨처럼 느껴졌다.


택배를 뜯고 아이템을 입고 신어보니 다행히 딱 맞았다. 혹시 교환이나 환불해야 하면 어쩌지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럴 일은 없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세 시였다...! 출근까지 네 시간 남았으니 (화요일과 목요일은 한 시간 늦게 일을 시작한다) 가볍게 운동이나 하고 와야지. 헬스장은 코워킹 스페이스와 같은 2층에 마련되어 있어 운동복만 갈아입으면 얼마든지 엘리베이터로 오가며 운동할 수 있었다.


헬스장에는 예상대로 아무도 없었다. 하긴, 누가 오후 3시에 운동을 해. 근데 오히려 좋아. 러닝 머신과 일립티컬을 오가며 80분을 꼬박 채워 운동을 마쳤다. 집으로 돌아와 씻고 차 한 잔 우려 마시니 여섯 시가 넘었다. 슬슬 일하러 가야지.


코워킹 스페이스로의 두 번째 출근 날. 역시나 아무도 없다. 이 건물의 부대시설은 여행자인 내가 제일 알차게 쓰는 것 같다. 전날보다 체력 소모를 덜했으니 이따가 덜 졸리겠지. 게다가 화요일과 목요일엔 한국 시간으로 오후 5시, 여기 시간으로 새벽 2시에 화상 회의가 있다.


대체 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었지. 밤 11시가 지나니 또 기다렸다는 듯 잠이 쏟아졌다. 이 시간에 커피나 에너지 드링크를 마실 수도 없는 노릇이라 참 난감했다. 이대로 10일 정도를 더 근무한다고? 쓰읍... 안 되겠는데... 회사는 직원의 자유를 최대한 존중해 주려 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일의 생산성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다. 근데 이렇게 야간 근무를 계속하다간 그 선을 넘을 것 같아 고민이 됐다.


새벽 2시에 시작한 회의가 3시 좀 못 되어 끝났다. 매니저에게 잠깐 할 말이 있다고 통화에 남아달라고 요청했다. 그가 처음 제안한 대로 시카고 시간대에 맞춰 나인투식스를 해도 되냐고 물어볼 참이었다. 진작에 그렇게 할 걸, 괜히 객기를 부렸다.


과연 다음날부터 근무 시간을 조정할 수 있을지? 다음 편에 계속...

이전 14화 시카고에서 회사 일하기 시작한 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