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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인 Dec 22. 2023

시카고에서 회사 일하기 시작한 날

2023년 10월 11일

지금 다니는 회사는 사무실이 영국에 있다. 영국인 직원도 있지만, 반 이상은 영국이 아닌 나라들에서 원격으로 근무한다. 나는 회사 안에서도 몇 없고, 우리 팀에서는 유일한 아시아인이다. 그래서 근무 시간이 팀원들과 한두 시간밖에 안 겹친다. (일에 지장만 없으면) 근무하는 시간과 공간에 선택의 자유를 주는 게 회사의 가장 큰 장점이자 이 회사를 선택한 이유고, 팀원들 역시도 같은 생각이더라.


규모가 크지 않아 온라인 접속 시간을 트래킹 하는 등의 근태 관리 시스템도 없다. ‘사무실 출퇴근 없이는 업무 생산성을 끌어올리기 힘들다’라는 통념은 이 회사의 가치관과 부합하지 않는다.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포지션에 맞는 일을 열심히 할 거고, 그렇다면 회사의 모니터링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회사와 임직원의 공통된 생각이다. 개인의 자율성을 신뢰하는 조직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어 입사했고, 1년 반 넘게 사무실은 없고 동료들은 지구 반대편에 있는 상태로 떠돌이 직장인 생활을 했다.


물론 회사는 회사다 보니 내가 부족해서, 혹은 회사의 비합리적인 시스템 때문에, 아니면 상식에서 한참 벗어난 업무 요청을 반복하는 클라이언트 때문에 열받을 때도 종종 있다. 안 좋은 점을 떠올리려니 엉킨 실뭉치가 딸려 나오듯 이런저런 에피소드들이 떠오르는데 이쯤에서 가위로 자르자. 그럼에도 시공간적으로 묶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게 이전까지 야근이 잦았던 직장인에겐 다른 모든 걸 가리는 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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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언제까지일지 모르겠으나 이 회사에 재직하는 동안은 그 자유를 최대치로 누려보고자 한다. 디지털 노마드처럼 노트북만 메고 여기저기 다니는 거다. 회사가 바쁜 시기엔 더블 모니터 없이 일하긴 힘드니까 덜 바쁠 때, 최대 한 달 정도로. 왜 한 달이냐면 그 이상은 짐은 무거워지고 지갑은 너무 가벼워지니까.


사실은 집이나 공유오피스처럼 내가 일하기 편하고 익숙한 곳이 아닐 때 회사 일을 잘 해낼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유럽 안에서는 이동이 자유로운 팀원들이 한 주는 영국에서, 그다음 주는 스페인에서 (심지어 가끔은 도시도 옮겨가며) 일하는 걸 보며 그 의문은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지난 5월에 생각하던 걸 조심스레 실천에 옮겨봤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행사에 참석하고 나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영국인 팀원들과 영국 본사로 건너가 일도 하고 여행도 한 것. 토종 한국인인 내게 행사도, 전후의 밍글링도, 사무실에서 동료들과의 만남도 쉽지 않았다. 근데 일하는 건 아무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여행의 설렘이 일할 때의 기분까지 좋게 물들이는 듯했다. 이게 되네?


기가 막히게 날씨 운이 좋았던 5월 영국 여행


작은 도전의 성공은 다음 도전의 규모를 한 단계 키웠다. 시카고 한달살기가 그 프로젝트다. 혼자서도 장기 워케이션을 할 수 있을까. 디지털 노마드들의 성지라는 포르투갈 리스본이나 태국 방콕도 후보지에 있었지만 굳이 미국을 고른 건 그냥 시카고에서 MBA 공부 중인 친구 때문이었다. 미국에 온 지 일주일도 안되어 왜 리스본과 방콕이 높은 순위에 있었는지 알게 됐다. 미국의 물가로는 한 달이 뭐야, 일주일만 넘어가도 손이 떨린다. 미리 알았더라도 같은 선택을 했을 거고, 있는 동안 정말 행복했지만 돈이 많이 드는 건 사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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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전체를 시카고에서 보내기로 한 이상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연차를 쓸 수 있을지 고민했다. 회사는 각 나라의 휴일을 존중하기에 한국의 빨간 날엔 나도 쉴 수 있다. 그래서 개천절과 한글날을 포함해 연차를 5일 정도 내고, 생일이 있는 마지막주에 또 이틀을 냈다. 그러니 그 사이의 2주는 평일에 일하는 거다.


10월 11일 수요일은 그 첫날이었다. 여행오기 전, 매니저와 근무 시간을 어떻게 정할지에 대해 논의했다. 시카고 기준 나인투식스로 일하면 한국에서 담당하던 아시아 클라이언트 업무에 지장이 있을까 싶어 그냥 한국 시간대에 맞춰 똑같이 일하겠다고 말했다. 매니저는 다른 팀원에게 잠깐 맡기고 현지 시간대에 맞추는 게 낫지 않겠냐고 물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게도 괜찮을 거라 호기롭게 단언했다.


한국의 오전 9시는 시카고의 오후 6시다. 이건 별 문제가 안 된다. 한국의 오후 6시는 시카고의 새벽 3시다. 이건 큰 문제다. 식사 시간 없이 일해도 새벽 2시인데, 졸려서 어떻게 버틴담? 근데 이 생각이 시카고에선 안 들었다. 이 정도 의욕이면 철야도 거뜬하다고 자신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그게 바로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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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엔 일해야 하니 낮엔 무리하면 안 되지. 그래서 다운타운이 아닌, 낯설지만 힙한 동네로 알려져 있다는 ‘클리본(Clybourn)’역 근처를 여유롭게 돌아보기로 했다.


외출하기 전, 친구가 등교하기 전에 제육볶음을 만들어줬다. 슬슬 한식 생각이 났는데 진짜 고마웠다. 매운 음식을 사 먹어도 한국의 개운한 매운맛이 아니니 약간의 느글거림은 사라지지 않았다. 근데 제육볶음이 그걸 단번에 해소해 줬다. 양배추가 잔뜩 들어간 고기반찬에 햇반, 그리고 한국에서 가져온 김. 이 맛은 못 잊는다. 예전엔 빵이랑 샐러드만 먹고도 이삼 주는 거뜬했는데 나이 들수록 한식 없인 못 살겠다.



기차역으로 향하는데 길목에 커다란 미술용품점이 눈에 띄었다. ‘BLICK art materials’라는 곳인데, 찾아보니 체인점이 몇 개나 있는 대형 브랜드였다. 미술용품 말고도 다양한 소품을 팔고 있었고, 아이쇼핑 하러 들어갔던 내 손엔 나올 때 다이어리와 플라스틱 접시가 들려 있었다.



클리본에 간 건 ‘블루밍데일 트레일(The Bloomingdale Trail)’이라는 아주 긴 산책로가 궁금해서였다. 직선 길이로 3마일(4.8km) 정도라 매년 8월엔 5km 마라톤 행사도 열린단다. 자전거를 타기에도, 조깅하기에도 안성맞춤인 반듯하고 넓은 길이다. 끝까지 걸어가니 주택가가 나왔다.


미국에서 느낀 건 모두가 할로윈에 진심이라는 거다. 마당이 있는 가정집은 저마다 으스스한 분위기를 연출해 놨다. 이층집 높이에 버금가는 해골 피규어, 얼굴 대신 호박을 달고 있는 허수아비 등 할로윈 분위기에 걸맞은 소품들이 잔뜩이다. 동화 같기도 하고, 시트콤 같기도 해서 자꾸 수상하게 남의 집들을 들여다봤다.


주택가 끝엔 또 다른 분위기의 동네를 만났다. 지도를 보니 ‘위커파크(Wicker Park)’ 근처였다. 서브 컬처의 중심지 같은 동네란다. 각종 브랜드 매장이 자유로운 모습으로 즐비해있다. 예티 매장에서 온갖 종류의 캠핑 용품을 구경하고, 옷을 사면 즉석에서 패치나 자수를 박아주는 챔피언 매장도 보고, 마지막으로 들른 피엘라벤 매장에선 칸켄 백팩을 샀다.



시간을 보니 오후 세 시가 다 되어 가길래 이만 돌아가기로 했다. 저녁에 일하려면 체력을 소진해선 안 돼.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 그리고 하나도 안 피곤한데 귀가한다니. 이런 게 현지인의 삶인가? 나 시카고언(Chicagoan)이야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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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와선 또 한식을 먹었다. 친구에게 허락받고 깻잎무침과 김을 꺼냈다. 친구 어머님께 받아온 깻잎을 내가 왜 축내냐고.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식재료는 떨어지지 않게 꼬박꼬박 장 봐서 채워 넣고 있다.


오후 다섯 시 반, 백팩에 노트북과 스케줄러, 이어폰, 충전기 선, 안경 등을 챙겼다. 근무 장소는 친구집과 같은 건물 2층에 있는 코워킹 스페이스였다. 이 건물 입주자의 대부분이 대학생이거나 대학원생인지라 시험기간에만 붐비는 곳이란다. 정말 나뿐이었다. 인테리어 디자인은 한국의 공유오피스 라운지와 비슷했다. 벽을 따라 미팅룸도 두 개 마련되어 있었다.



예상대로 11시까진 멀쩡했다. 주변엔 아무도 없고 조용하니 업무에 절로 집중이 됐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고요함이 어찌나 졸음을 유발하던지. 게다가 일교차가 큰 날이라 점점 추워졌다. 새벽 한 시부터는 졸음과의 싸움이 치열했다. 할 일은 진작에 다 했고 미팅도 없는 날이라 지루하기까지 했다. 어찌저찌 한 시간을 버티다 친구집으로 도로 짐 챙겨서 올라왔다. 이불 속에 들어가며 생각했다. 나 다음 주까지 이렇게 일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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