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사정을 조금만 배려하면 충분히 아름다울수 있다.
1호에 살던 그녀는 이번에 다른 곳으로 옮긴 다고 하였다. 3개월 전, 그녀는 명확히 이사 의사를 밝혔다. 부동산에 임대를 내놓았다. 보통 세입자가 늦어도 3개월 전에는 말해주어야 임대인도 전세보증금을 원만히 내어 줄 수 있다. 부동산에 내놓는 시기가 늦어지면 그만큼 다음 세입자를 구하는데 애를 먹게 된다.
사람일이다 보니 시기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게 어디 있으랴. 시기도 서로 말을 잘해서 조율하면 얼마든지 가능할 터인데 그렇지 않을 때도 간혹 있다. 1호 그녀가 나가는 시점이 거의 1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집을 보러 다녀간 몇몇이 중 한 사람이 계약을 하고 싶어 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갑자기 1호 그녀에게 연락이 왔다.
" 사모님 죄송한데요. 혹시 아직 계약서를 쓰신 게 아니면 제가 연장하면 안 될까요?"
" 아~ 이사를 가신다고 해서 집 계약하러 가려고 했는데 무슨 일 있으세요?"
" 도저히 금액에 맞는 집이 안 구해져서요. 이사 가는 것도 촉박하고......."
전셋값이 많이 올랐다. 하긴 한 집에 몇 년씩 오래 살면 시세를 확인하기가 힘들다. 지금 당장 나에게 닥친 일도 아니고 이사를 가는 것도 아니니 신경을 쓰고 있지 않는다. 그러다가 계약종료일이 다가온다거나 결혼이나 이직등의 이벤트가 있으면 그때부터 관심을 갖는다. 이 친구가 그랬던 것이다.
3달 전에 내게 퇴거의사를 밝혔으니 그때부터 2달 정도는 알아봤을 것이다. 전셋값이 폭등하는 바람에 현재 보증금을 가지고는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의 집을 찾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것도 이유지만 이사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에너지를 많이 소모한다. 이사하는 게 크게 메리트가 있지 않으면 그대로 유지하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다. 집주인의 마음도 세입자가 크게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면 기존 세입자가 사는 게 마음 편하다.
그나저나 1호 그녀의 전화를 받고 일단 확인을 해봐야 했다. 부동산에 이야기를 했더니 새로 계약을 할 세입자가 가계약금을 넣지 않았고 아직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아 가능하다고 했다. 가계약금을 받으면 이렇게 계약이 파기 시 임대인 쪽에서 파기한 것으로 간주하여 통상 가계약금의 2배를 돌려줘야 한다.
하지만 그 전화를 받은 순간 내 마음속에 작은 파란이 일었다. 솔직히 이번에 전셋값이 많이 올라 기존보다 2000만 원을 올려 세를 내놓았었다. 새로 올 새 입자는 그 전세가에 들어오는데 1호 그녀의 사정을 봐주면 내 입장에선 2000만 원을 올려 받을 수 있는 기회를 2년 동안 놓치게 된다.
' 계약금을 받아서 안된다고 할까?' 내 머릿속에 셈이 이어졌다. 돌이켜보니 1호 그녀는 별 트러블이 없이 잘 살아주었고 종종 마주치면 인사도 했다. 시간도 얼마 안 남은 거 같은데....... 그렇게 하면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다. 결국 부동산에 아직 계약전이니 계약할 사람에게 잘 이야기해달라고 부탁했다. 대신 1호 그녀에게 500만 원만 올려서 재계약을 하기로 하고 부동산에서 만났다.
보통 재계약등을 하게 되면 부동산에서 '대필료'를 받는다. 5~10만 원인데 계약자와 임대인 모두 양쪽에서 낸다. 1호 그녀는 사정을 봐주어서 감사하다며 부동산 대필료를 대신 내었다.
한겨울을 알리는 매선 바람이 일던 날, 1호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갑자기 보일러가 작동을 안 해서 AS를 불러도 되겠냐고 묻는다.
" 날도 추운데 언제부터 작동이 안 되었어요?"
" 어젯밤부터요. 밤에 조금 버벅거리더니 아침부터 작동이 안 되네요"
" 에고~불편했겠어요. 제가 접수하고 빨리 조치할게요."
간밤에 보일러 고장이 많았는지 AS기사님이 조금 늦게 왔다. 다행히 센서가 작동을 하지 않아 그것만 교체하면 된다고 한다.
"사모님, 제가 센서비 낼게요. 신경 쓰지 마세요. 보니깐 얼마 하지 않네요"
나는 잠시나마 추웠을 그녀에게 따뜻한 커피세트로 답례를 하였다.
간혹 가다 전구교체, 각종 기물에 대한 수리비, 보일러 교체비 누가 내야하나에 대한 시비가 일어난다. 내 경우 세입자의 고의적인 파손이 아니면 내가 수리하고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 솔직히 그게 마음 편해서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임대인의 마음속에 자신이 사는 집이니깐 소모품, 웬만한 간단한 것쯤은 세입자가 잘 쓰고 관리해주길 바란다. 모든 것을 법까지 끌고 가서 ' 이것은 임대인, 이것은 임차인'하면 얼마나 강퍅한가. 물론 서로 합의가 안되다 보니 거기까지 갔겠지만 말이다. 서로의 입장에서 조금만 배려를 하면 충분히 잘 살수 있는 세상이다.
요즘 전세사기, 임대인과 임차인 분쟁 뉴스가 많다. 우리 건물에서 별 탈 없이 지내주는 임차인들에게 다시 한번 고마움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