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공부를 하겠다고 미국까지 건너온 건 좋았다. 하지만, 막상 공부만 파고들 용기가 부족했다. 대학교 4학년 중간에 취업계를 내고부터 쭉 일을 해왔던 나였다. 손에 일이 없다는 게 오히려 불안하게 느껴졌다. 막상 일을 안할 자신이 없었달까. 그렇게 나는 공부와 일을 병행하기로 했고, LA XX일보 인턴에 지원했다. 1년 남짓되는 인턴십이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미국이라는 낯선 환경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이 된 시간이었다.
말이 인턴이지 일당백을 해야하는 포지션이었다. 우선 취재를 하기 위해선 운전면허를 따야했다. LA는 땅이 넓고, 대중교통이 불편해서 차 없이는 취재가 불가능한 구조였다. 인력 부족으로 인해 인턴도 취재 장소에 가서 알아서 취재를 해와야 하는 구조였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4천달러 혼다 시빅 중고차를 구매했다. 그렇게 샤무(차의 애칭, 샌디에고 씨월드의 Orca 이름에서 따옴)와 함께 LA 방방곡곡을 누볐다.
매일 새로운 곳을 취재하고, 미국 사회를 몸소 경험하고, 아메리칸 드림을 좇아 이곳에 온 수많은 올드타이머들을 인터뷰했다. 젊고, 열정적이고, 호기심 많았던 20대의 나에게 이보다 더 신나는 일은 없었다.
한 선배가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다. 상당히 현실적이고 직설적인 사람이었다.
“여긴 한국에 있는 언론사라고 생각하면 안돼. 한국으로 치면, 외국인 노동자들이 모여사는 곳 있지? 예를들면 인도네시아 커뮤니티 신문문이라고 보면 돼. 옆집 순이가 애 낳은 것까지 기사가 되는 곳이라고.”
뭘 또 그렇게까지. 그땐 이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이분 요즘 많이 힘드신가…?’하고 넘겼다. 하지만,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4백만 인구가 모여사는 LA에서 소수인종인 한인의 눈과 귀가 되어주는 일을 하는 거니까. 특히 온라인에 익숙하지 않은 이민 1세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종이신문은 필수적인 매체였다. 그렇기에 나는 이 일이 더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
출근 첫날,
저녁 6시 정각이 되자 직원들은 약속이라도 한듯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국장이나 사장이 퇴근하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았다. 언론사에서 정시 퇴근이라니. 야근을 밥 먹듯 하던 한국에서의 경험을 떠올리면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렇게 나는, 말로만 듣던 가족 중심의 회사 문화를 체험했다.
“정말 가도 돼요?”
“눈치보지 말고 가도 돼. 여긴 미국이야. 너 할 일만 잘 하면 돼!”
인턴이 하는 일은 신문 스크랩하기, 온라인에서 한인 관련된 사건 사고 찾기, 주요 이슈 영문 기사 번역하기, 내방 인터뷰하기, 한인단체 행사 취재가기 등이었다. 모든 것이 새롭고 재밌었다. 상사에게도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게 나를 힘들게 할 줄은 몰랐다. 당시 나와 비슷한 시기에 온 인턴 한명이 더 있었는데, 다른 부서에 배정돼 각자 주어진 일을 했다. 이외에도 비슷한 또래의 여자 친구들이 두세명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여자들이 많이 모이면 말이 많아지기 마련이다.
나는 꼭 필요한 얘기가 아니면, 내 이야기를 함부로 떠벌리지 않는다. 반대로 상대방이 뭘 하든 크게 관심이 없다. 이런 내 성격과 성향이 당시 20대의 친구들에게는 ‘여우’로 보였나보다. 항상 시기와 질투가 문제다.
“언니, 아까 부장님이 언니한테 뭐 줬다며, 왜 언니한테만?? 왜 얘기 안했어?”
아니 그게 왜…내가 누구한테 뭘 받았는지 일일이 보고해야할 의무는 없지 않나. 그 시간이 내 인생에서 맘고생을 제일 심하게 했던 시기로 남아버렸다. 사람들의 관계도 좋았고, 일도 좋았고, 인정도 받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그걸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지 못하던 이들…
사실 일일이 해명하고 보여줘도 오히려 오해의 소지만 더 늘어날 뿐 소용없을 때가 더 많다. 사람들이 나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다면, 너무 그곳에 마음 쓰지 말자. 내가 변하지 않는다면, 결국 모든 것은 알아서 제자리를 찾아가더라. 억지로 되돌리려 할 필요 없다. 어차피 스쳐 지나갈 인연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