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료 체크하러 갈 시간
퇴사한 지 딱 한 달이 되었다.
그간 돌아보지 못했던 집안일과 회사를 다니며 할 수 없었던 은행 업무 등을 처리하며 회사를 다닐 때보다 더 바쁜 한 달을 보냈다.
그간 나는 그저 퀘스트를 깨는 게 목적인 게임 속 캐릭터가 된 것처럼 to do list를 작성하고 정신없이 지내왔는데 한 달이 된 시점(이때는 많은 일을 마무리해서 조금 여유가 있었다.) 오전 10시에 울린 알람에 당황하여 휴대폰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처음엔 내가 왜 이 시간에 알람 설정을 해뒀을까 의문이 들었다가 이내 회사에서의 루틴이 떠올랐다.
9시 출근 후 컴퓨터를 켜고 커피를 탄다.
탕비실 조차 없는 작은 회사라 사무실 안에 있는 정수기와 책장 한편에 마련된 커피 코너(이곳에는 믹스커피를 비롯한 블랙커피, 둥굴레차, 녹차가 박스 채로 담겨 있었다.)에서 항상 마시던 블랙커피를 골라 스틱 윗부분을 손으로 쭉 찢고 텀블러에 탈탈 털어 넣어 뜨거운 물을 가득 담는다. 생각해보면 간단한 이 동작을 수행하면서, 정확히는 컴퓨터를 켜고 커피를 타서 다시 내 자리로 돌아오는 단 몇 분의
시간 사이에 나와 동료 사무실 여직원 2명은 어제 퇴근 후 오늘 아침 출근 전까지 있었던 일을 빠르게 풀어내고 오늘의 이슈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30분을 훌훌 날려 보내고 나는 공유폴더에서 오늘의 서류 작성을 위한 파일들을 쏙쏙 골라 내 컴퓨터로 복사-붙여 넣기를 몇 차례 하고, 아직은 현장에서 오늘 사용할 물품을 다 가져가지 않아 10시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명분으로 인터넷 웹서핑을 신나게 즐긴다. 때때로 주식창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자주 가는 카페에 들어가 정보를 얻기도 하며, 아침부터 폭풍 쇼핑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새 10시가 된다. 내가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렸을 딱 그 시간, 10시다.
나는 왜 퇴사 후에도 이 알람을 신경 쓰지 않았을까? 그동안에도 계속 울렸을 텐데 바쁘게 생활하다 보니 알람이 울려도 아무 생각 없이 중단 버튼을 누르고 지나쳤던 게 틀림없다.
이 알람이 울리면 위생모와 위생 가운으로 갈아입고 현장에 내려간다. 아차, 나는 식품제조 공장에서 품질관리 업무를 했다. 뭐, 대부분의 업무가 품질관리와는 전혀 무관했지만.
어쨌든 현장에 내려가 현장 위생상태를 돌아보고 어제 사용한 원료와 오늘 사용할 원료의 수불부를 작성한다. 이 업무는 30분 정도 걸리지만 매우 중요한 업무이기에 빼놓을 수가 없다.
그런데 나는 그 중요한 업무를, 1년간 해온 그 업무를 퇴사 한 달도 되지 않아 빠르게 잊고 다시 전업주부의 생활을 하고 있다.
알람이 울리고 알람의 존재를 다시 깨닫기까지의 시간이 약간 있었지만 그 짧은 시간 안에 나는 빠르게 변한 내 상황을 돌이켜봤다.
퇴사 전 10시는 가장 중요한 업무를 하던 시간이었지만, 퇴사 후 10시는 작은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는 혹은 큰아이의 온라인 수업을 도와주는 시간이 되었다.
업무의 질과 양이 달라졌지만 10시는 여전히 중요한 시간임에 틀림없다. 이 알람을 지울까 하다가 이내 손을 거두고 지우지 않기로 한다. 퇴사는 했지만 알람은 그대로 남아 끊임없이 다른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