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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빈 May 21. 2021

비가 새지 않는 집

이제 비 오는 날도 괜찮아.






"요즘 왜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 거야? 너무 추워."

목욕을 마치고 나온 10살 아들이 후다닥 옷을 입으며 말했다.




"엄마는 그래도 이 집에 오고 나서는 비 오는 날이 좋아, 빗소리도 꽤 괜찮지 않아?"


"왜? 전에 집에서는 비 오는 날이 싫었어?"


"그럼, 엄청 싫었지. 비 오면 비가 샜잖아."


"비가 샜다고? 어디?"


"우리 자던 방!"


"에? 우리 자던 방? 난 몰랐는데."



당연히 아들은 몰랐을 것이다. 비가 오던 날 행여나 집이 물바다가 될까 창틀에 휴지를 풀어헤쳐 끼워 넣고, 창문 아래에는 수건을 여러 장 겹쳐 깔아 둔 나의 수고가 있었으니 당연히 아들은 비가 샌다는 걸 알 턱이 없었다.




우리 부부는 결혼 9년 차에 드디어 내 집 장만을 했다.

신혼은 18평 자그마한 아파트에서 시작해 큰 아이가 세 살 무렵 조금 더 넓은 다세대주택으로 이사를 했다.

무려 40년이 넘은 다세대주택으로 말이다.




나름 이것저것 하자 보수를 하고 들어갔는데도 40년 세월의 흔적은 잊을만하면 툭 튀어나와 나를 곤란하게 했다. 처음 그 집에 갔을 때도 벽과 벽이 마주하는 틈새에는 결로로 인한 곰팡이가 가득했고, 화장실에선 퀴퀴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베란다가 없는 집은 외벽과 맞닿은 벽에서 겨우내 물이 뚝뚝 흐를 정도로 결로가 심했고, 나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소량의 락스를 물에 타 벽지에 뿌리고 한겨울에도 창문을 활짝 열어두며 아이가 하원 하기 전에 냄새가 다 빠지길, 곰팡이가 사라지길 기다렸다. 그렇게 6년을 보냈다.




하지만, 그래도 결로쯤이야. 내가 부지런히 움직여 약을 치고, 창문을 열어두는 지겨운 생활을 반복하다 보면 겨울은 끝나고 봄이 와 언제 그랬냐는 듯 벽은 말랐다. 우리나라는 4계절이니까, 한철만 그렇게 고생하면 나머지 3 계절은 곰팡이와 싸우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비가 새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이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안방 창틀이 벽에서 떨어져 블라인드와 함께 점점 기울고 있었다. 다시 업자를 불렀고, 업자는 창틀을 타카로 몇 번 박아줬는데 그때 이 문제를 제대로 잡지 않을 걸 두고두고 후회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지만 샷시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건지, 비가 오면 비가 새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비가 창틀에 떨어졌고 이는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 비가 그치면 말라 사라졌고, 그 이후로는 벽을 타 떨어지고 나중에는 바닥을 흥건하게 했다.



아, 그런데 나는 세입자 아니었던가. 이미 40년이 넘은 주택에 크고 작은 하자가 있어 이것저것 고쳐달라고 했던 터라 더 이상은 요구할 수가 없었다. 나도 양심이 있지.

(그리고 샷시 교체라는 게 살면서 간단히 수리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더라.)






그렇게 비 오는 날은 나에게 가장 우울하고, 가장 힘든 날이 되었다.

새벽에 비가 오기 시작하면 나는 잠도 이루지 못하고 또 비가 새지 않을까 창문만 바라보고 있게 되고 외출을 해도 비가 온다 치면 집에 달려가기 일쑤였다.





한 번은 가족끼리 여름휴가를 전주로 다녀왔는데 그때 정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졌다.

2박 3일의 여행 후 돌아온 집은 그야말로... 나에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좌절감과 우울함을 안겨줬다.

분명 난 즐겁게 놀고 왔는데, 이 집에서의 비 오는 날은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깊고 진한 습도의 우울감으로 가득 찼다.






집을 매매하기로 결심하고 리모델링을 시작하며 나는 무조건 전체 샷시 교체를 원했다. 다시는 비가 새는 집에서 살 수 없는 노릇이었다. 비가 오는 날 커피 한잔과 책 한 권이 주는 여유로움을 이제는 나도 느낄 자격이 된다고 생각했다.



집을 매매하던 날, 리모델링이 시작되었고 나는 뜯겨 나간 새집의 샷시를 바라보며 제발 잘 시공되기만을 기도했다.



새 샷시가 도착해 창틀이 완성되고 유리가 들어오는 모든 순간을 체크하고 확인하며 혹시 모를 누수에 대비해 우리가 이사 오기 전에 비나 한번 왕창 내려 비가 새는지 테스트해보고 싶었다.






지금은 이사한 지 두 달이 되어간다.


그리고 오늘은 비가 오는 날이다. 다행히 비가 새지 않는다. 아니 이제 당연히 비가 새지 않는다.

아침에 웃으며 남편에게 오늘 비가 올 것 같으니 우산을 챙겨 나가라고 했다.

아들에게도 태권도에 잘 다녀오라고 얘기하고 나도 밖으로 나왔다.




비 오는 날, 아무 걱정 없이 외출을 할 수 있다니.

이제 비가 와도 더 이상 집에서 비가 샐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이젠 비 오는 새벽에 일어나 창틀을 바라보며 비가 새는지 확인하지 않아도 된다.





겪어본 사람만 아는 집의 크고 작은 하자들은 때때로 피가 마르도록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


당연히 정상이어야 할 부분이 정상이지 않은 집에서 6년을 살다 보니, 비가 새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 집에선 감사하며 살 수 있다.



그리고 나는 비 오는 이 저녁에 커피를 내리고, 또 당연히 정상이어야 하는데 내가 누리지 못했던 비 오는 날의 여유를 이제는 누릴 수 있음에 감사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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