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1. 2020년 1월 뉴질랜드 - 정착이라는 것은, 나에게
<챕터 1 미리보기>
- 노마드 인생이 된 데에 대한 배경 설명
- 미국 정부 프로그램 통해 이주 시도했으나 말아먹음
- 호주 기술이민도 말아먹음
- 뉴질랜드 기술이민 도전 (다음 챕터에 나올 예정인데 참고로 이것도 실패)
- 합리화인지 뭔지 왜 정착이 기본값인지 질문을 던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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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노마드로 살고 있다고 하면 이야기하게 되는 것들 중 큰 하나가 ‘왜’에 대한 것이다. 왜 디지털노마드로 살고 있나요? 안 피곤해요? 계속 옮겨 다니는 게. 그러면 대답한다. 피곤한 게 맞아요.
사실 나는 디지털노마드로 살고 싶다고, 꿈을 꾸고 준비를 해서 디지털노마드가 된 것은 아니다. 몇 년 전에는 나도 정착을 하려고 했던 때가 있었다. 그 정착지가 한국은 아니었지만.
나는 어렸을 때부터 외국에서 내가 오래 살 것 임을 알았다. 정확하게는 중학생 시절을 보내면서. 왜? 글쎄요. 당시에는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고, 그저 ‘아, 나는 언젠가는 외국에 나가서 살겠구나,’ 했다. 이런 막연한 확신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하고 그때에는 갸웃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당시의 나는 나도 모르게 미래의 나를 잠깐 내 안에서 만난 것이겠구나, 한다. 이미 외국에서 살고 있는 나와 중학생인 그 당시 현재의 내가 나라는 사람 안에서 맞닿아서, 그래서 알았다. 그렇게 될 것을. 외국에서 살고 ‘싶다’가 아니었으니까. 외국에서 살 것임을 ‘알았다’는 것은 분명 다른 이야기다.
나는 공부는 나름 잘했지만 모범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부모님과 선생님에 대한 반항도 잦았고, 그래서 목소리를 높여가며 싸우는 일도 많았다. 부모님은 초등학생이 되자마자 나의 반항기가 시작했다고 주장하신다. 선생님께 버릇없게 말했다고 교무실에서 발로 차인 적도 있었고, 술냄새 담배냄새를 풍기며 수업에 들어온 선생님을 향해 친구들과 함께 단체로 수업거부를 한 적도 있었다. 오해마시라, 좋은 선생님들도 많이 만났다. 다만 뒤돌아보니 알겠다. 애매한 것들은 애매한 대로 흘려보내곤 하지만, 좋고 싫음, 정의와 부당함이 분명한 것에는 그 의사를 표현해 왔다는 걸. 내가 외국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 데에는 항상은 아니더라도 꾸준히 중요한 순간에 자의든 타의든 내가 나의 목소리를 내온 것이 기반이 되었다.
처음으로 해외에 길게 나온 것은 대학생이던 2009년 겨울이었다. 나는 교환학생을 가기에는 학점이 낮아서 도전이 어려웠는데, (과에서 꼴찌였기에 시도도 할 수 없었다는 게 맞다) 대신 미국에 교생실습을 하러 갈 기회가 생겨서 한 달을 미국 고등학교에 출퇴근을 했다. 과 성적이야 어떻든 간에, 미국 고등학생들을 가르치기에 전공에 대한 내공이 부족하지는 않을 것이고, 과학전공생들 사이에서 영어로 수업을 할 수 있을 만큼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 과에 나밖에 없다는 교수님의 결론으로 감사하게 학점이 바닥인 나에게 기회가 주어진 것이었다. (지금도 많이 감사합니다, **주 교수님)
한 달을 그렇게 살아보고 외국에서 살게 되겠다는 나의 그림은 더 선명해졌다. 당시에는 그 외국이 미국인가? 생각도 했지만 졸업하고 미국으로 돌아가기는 쉽지 않았다. 낮은 학점이 발목을 잡았고, 정부 프로그램에 지원을 했지만 면접을 시원하게 말아먹었다. 한 번도 마셔보지 않은 커피를 하필 그날 처음 마셔보고는 심장소리가 쿵쿵대는 것이 귀에 계속 울려대는 와중에 질문이 하나도 들리지를 않았다. 뭐 어쩌겠나 헛소리라도 하다가 나와야지, 면접인데.
그렇게 미국에서 눈을 돌려서 다른 곳으로라도 갈 수 있을까 하다가 호주를 갔다. 워킹홀리데이라는 20대에게 주어지는 특권 같은 비자를 알게 되었고, 호주에서 3년을 즐겁게 생활했다. 너무 즐겁고 재밌어서 호주에서 정착을 하고 싶었다. 내가 살게 될 외국이 바로 여기인가! 이 땅이 그 땅인가!
주변에 기술이민을 하는 외국인 친구들을 보고 나는 이민이라는 것을 만만하게 봤던 것 같다. 어휴, 대충 점수 채워서 넣으면 내 순서가 오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 포인트시스템으로 돌아가는 호주 이민 정책은 매해 바뀌었고, 나름 노력이라는 걸 하기는 했지만 이민 성공을 위해서는 부족했다. 중등교사 자격증이 있던 나는 중등교사가 많이 부족한 호주에서 기술이민을 시도했고, 중등교사 자격증을 호주 기관에서 심사 통과받고, 공인영어점수를 획득했다. 추가 점수를 받으려고 통역 시험도 쳤다. 공인영어점수를 더 높이면 호주 이민성에서 더 점수를 줬을 텐데, 시험공부가 지겨운 나는 이 정도면 되었겠거니, 했다. 그때 관두지 않고 노력해서 더 높은 그 점수를 땄으면 얼마 안 가 영주권을 받았을 텐데, 이내 놔버리고 뉴질랜드로 떠난 나는 결국 호주 영주권을 받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난 디지털노마드로 살려고 그때 이민을 못 간 것이었나 싶다. 자기 합리화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돈만 오질라게 썼다. 어휴 그게 다 얼마여.
그렇게 호주이민을 내려 놓고선 두드린 돌다리가 디지털노마드 생활이었다. 나름 나의 디지털노마드 1.0 생활이라고 해야 할까. 베타 테스트기간이라 해야 하나. 디지털노마드라는 단어를 흔하게 들을 수 있는 시절도 아니었고,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보지도 못했다. 그저 정착을 하면 정착을 한 곳의 생활에 집중하느라 여러 나라를 많이 못 다닐 테니 뭐라도 확정되기 전에 많이 다니자는 생각이었다. 사실 호주를 처음 갈 때에는 호주에서 1년, 뉴질랜드에서 1년, 캐나다 1년, 아일랜드 1년, 영국 1년, 어디든 워킹홀리데이가 있는 곳에 20대 동안 다 가보는 것을 기대하며 시작을 했는데, 첫 나라에서부터 나는 정착을 생각해 버리는 통에 다른 나라들을 제대로 못 가보게 생겼으니, 영주권 나오기 전에 돌아다녀야지. 나는 김칫국도 잘 마셔서 찰떡같이 영주권을 받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래서 미국, 호주, 뉴질랜드, 하와이, 캐나다를 온라인으로 일하며 9개월 동안 다녔다. 세상에나 노는 사진만 잔뜩있고 새벽에 일하거나 하는 사진은 없네 허허.
그때 내가 왜 그랬지? 왜 그렇게 정착이 당연했지? 하고 생각해 보면 글쎄, 그리고 나는 호주가 참 좋았고 또 다들 그렇게 정착을 했더랬다는 것 외에는 뭐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다들 어딘가에 또는 누군가와 정착을 했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가정을 이루는 친구들도 많았고, 대기업에 다니거나 공무원 생활을 하는 친구들도 모두 안정적인 생활을 했다. 호주에서 만난 현지인 친구들도, 나처럼 워킹홀리데이를 온 유럽친구들도 계속 옮겨 다니는 삶을 장기적으로 살겠다는 이는 없었다.
스위스에서는 투표를 할 때 마음에 드는 선택지가 없으면 원하는 선택지를 적어서 넣을 수 있는 빈칸이 있다던데. 나는 한참 나중에서야 내 인생의 선택지에 빈칸이 있다는 것을, 그 희미한 자국을 눈치챘다. 보여. 지금은 나만의 답을 적을 수 있는 칸이 보인다. 보면 볼수록 희미함이 선명해지는 그 칸. 예전에는 정말 안 보였다. 2019년, 2020년에 디지털노마드 생활을 테스트해 보면서도 빈칸이 안 보이는 답지를 붙들고 나의 인생에서 정착이라는 것을 어떻게든 해보려는 노력들만 계속 있었다.
그렇게 내가 호주 다음으로 정착지로 결심한 곳은 뉴질랜드였다. 이걸 결정할 당시에는 디지털노마드 1.0의 9개월 기간동안이었는데, 나는 이 시간을 일탈이라고 생각했지 내가 계속 이어나갈 수 있는 상수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유 잠깐이면 몰라도 내가 그걸 진짜 할 수 있겠냐, 싶었고. 무엇보다 계속 내가 어디 있을지 모르는 것에 대한 불안함과 피곤함도 조금은 있었겠지. 뉴질랜드에서 일자리를 잡아서 직장을 통해 스폰서십을 받으면 일정기간 (보통 3년) 이후에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었기 때문에 뉴질랜드 워홀을 할 동안 친해진 친구의 소개를 받아 면접을 봤고, 일을 하기로 결정했다. 일이 술술 진행이 되면 어느 순간 아 이게 잘 될 건가 보다 하는 느낌이 든다. 이때가 그랬다. 와 잘 풀리는데?
일자리를 결정한 이후로 모든 게 일사천리 흘러갔다. 당시 나의 생각으로는 호주에서 혼자서 이민을 해보겠다고 아등바등하다가 기회를 놓친 전적이 있으니, (비자 전문가가 나에게 영어성적을 꼭 최고 포인트를 받을 수 있게 따야만 한다고 조언을 해줬으면 영주권을 받았을 것이라는 남 탓을 이때에도 했다) 뉴질랜드에서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그래서 비자 수속을 전문으로 하는 현지 법무사들을 여럿 찾아가서 나의 일자리에 대한 설명을 하고 어떤 포지션으로 넣어야 할지, 기간과 비용은 얼마나 걸릴지 등을 상담했는데 영 마음에 쏙 들어오는 사람이 없었다. 이것도 복이야. 일 잘하는 사람 만나는 게 복이에요, 여러분.
그러다가 일을 하기로 한 곳의 대표님이 본인의 변호사님을 소개해 주셔서 만났는데, 바로 그 자리에서 이 분과해야겠다는 결정을 했다. 이미 대표님의 사업체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일자리에서의 나의 역할에 대한 이해도가 가장 좋았고, 그랬기 때문에 이제까지 내가 만났던 모든 법무사들이 생각하지 않은 포지션으로 비자를 넣자고 제안을 주셨다. 내가 도착하니까 이미 어느 포지션으로 넣을지 미리 준비를 다 해놓으셨더라. 일을 잘하는 분이라는 느낌이 단번에 들었다. 그리고 누구나 그렇듯이, 나는 일을 잘하는 사람을 참 좋아한다. 변호사님이 제안한 포지션이 뉴질랜드 이민성에서 확실히 더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명시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나니, 이제까지 내가 만났던 법무사들, 너네는 그래서 어떻게 밥을 벌어먹고 사니, 하는 생각이 밀려든다. 수임비가 법무사보다 두 배는 들지만 나는 이제 안다. 돈을 잘 쓰는 게 돈을 아끼는 길이다.
수임을 확정하고 나왔다. 이제 다 정해졌다. 나는 뉴질랜드에서 정착을 하겠구나. 예전에 2017년에 뉴질랜드 워킹홀리데이 1년간 생활을 하면서 여기에 단단한 친구들 그룹도 이미 있고, 여유로우면서 천천한 삶의 속도가 맞기도 하다. 누군가는 지루하다고 하는 삶이 나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호주에서도 뉴질랜드에서도 그래서 내가 나하고 잘 맞는다고, 정착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여기서 멈춰도 되지. 이제 나도 평범하게 살 때가 되었지.
외국에서 살게 될 것은 아는데, 그 외국이 어느 나라인지는 몰랐던 나는 조금 돌아다녀보면 내가 눌러앉을 곳이 어딘지 알 수 있지 않을까 했던 것 같다. 정착하는 친구들, 결혼하고, 직장에서 승진하고, 아이가 생겨 가정을 이루고 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계속 돌아다니는 건 젊을 때나 하는 것이고, 나도 이제 철이 들 때가 되었지, 하는 생각을 했을까? 마흔에 다가가는 지금 생각하면 참 그때도 너무나 젊었는데. 모두 다가 하는 그 생각을 아마 나도 했던 거다. 게임처럼 깨야하는 다음 단계의 일들.
정착이라는 것은 무얼까, 나는 왜 정착을 하고 싶을까, 정착을 해서 얻는 것과 잃는 것은 무엇인가. 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내 삶을 안정시켜 나가는, 한 지점에서 나를 무겁게 만드는 과정. 무거워지는 것은 나일까 내 삶일까. 지금 던지는 이 질문들의 답을 그때와 지금 비교해 보면 웃음이 나온다. 참 내가 달라지긴 했어.
정착이 어떤 면에서는 마침표와 같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움직이지 않는 점으로. 한 지점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것. 그러다가 점을 선으로, 면으로 점점 넓혀 나가는 것. 그런데 나는 정착하지 않고 지금처럼 떠돌아다니며 사는 삶에서 너무나 많이 성장했다. 감사하게도 나는 그 어느 때보다 가장 입체적이고 깊이 있는 내가 되었다. 떠돌아다니며 스스로를 키우기 전에는 알 수 없던, 가장 나답게 살 수 있는 나다. 마침표가 아닌 쉼표 같은 삶을 살았다. 나는 지금은 많이 나아진 부분들이 있기는 하지만 예전에는 대체로 모든 면에서 성격이 급했다. 빠르게 결론에 도달하고 싶어 하고, 과정을 견디지 못하는 경우가 잦았다. 결과에 빠르게 도달하지 못하면 쉽게 포기하기도 했다. 정착이라는 마침표도 그래서 빨리 찍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빨리 자리 잡고, 나도 안정적으로 살고 싶다고. 다른 이들이 하는 것들을 나도 그 통과의례들을 다 넘어가고 싶다고.
지금은 정착이 끝이 아닌 시작이라고 느껴진다. 그렇게 보면 난 아직 시작도 못한거지. 하지만 시작점이 다를 거라는 생각은 한다. 자라난 나이니까. 디지털노마드 생활을 하며 많은 친구들을 만나고 보니, 이 생활을 오래오래 하는 친구들도 있지만 몇 년을 떠돌며 살다가 한 곳에 정착하는 친구들도 많고,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일 년에 4-6개월을 돌아다니는 친구들도 많다. 각자 자신들의 무게중심을 잡아가는 모습들을 많이 보게 되고, 그렇게 새로운 생활의 장을 열어간 친구들을 목격하고 나니 정착이 끝이 아닌 시작이라는 것이, 같은 답지가 다르게 느껴진다.
끝은 아쉽거나, 후련하거나, 씁쓸하거나, 기쁘거나 할 수 있다. 시작은 설레거나, 기대감을 가져다주거나, 두렵거나, 미지의 세계로 어둠 속에 발을 내딛는 느낌이거나 할 수 있다. 왜에 대한 뚜렷한 답이 없었던 그 시절에 비해 정착에 대한 나의 생각과 감상은 그렇게 두꺼워졌다. 모두들 당연하다는 듯이 정착을 해 살지만, 사실 인류가 정착을 해서 산 것은 인류 역사에서 그리 큰 부분을 차지하지 않는다. 정착할 이유가 없는 이상, 굳이 정착을 할 필요가 있을까? 정착을 했을 때의 나보다 떠돌 다니는 내가 적어도 지금은 더 많이 성장하고 더 즐겁고, 더 만족스러운 삶을 나답게 사는데. 정착이 나쁘다는 게 아니고, 한 번쯤은 나는 왜 정착을 해 살고 있는지, 이게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이 맞는지는 질문해 볼 만하지 않을까.
그러니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질문을 던져보시라. 왜 정착을 해서 살고 있는지, 정착을 통해 당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은 무엇이며, 그 감정의 변화를 관찰할 때 발견하는 나의 모습은 무엇인지, 정착 외의 답지를 나에게 주었던 적은 있는지, 정착을 하게 된 건 그 외의 선택지가 없어서 그랬던 것은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