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5. 무슨 단어를 붙잡고 태양을 또 한 바퀴 돌까
<챕터 5 미리보기>
- 생일은 365일 중 하나가 될 수도, 의미있는 분기점이 될 수도 있다.
- 춤이 명상이 되기도 한다.
- 아무도 안 보는 자연 속에서 옷을 벗고 춤을 출 수 있으면 해라.
- 한식이 짱이다. 떡볶이 사랑해.
“아, 예약금으로 지금 반을 보내고 내가 도착하면 나머지 반을 내면 되는거야?”
사이프러스에 코리빙이 있다는 걸 알게되고 심지어 웹사이트도 없고 예약도 왓츠앱 메세지로 받는 것이 꺼림칙하지 않았던 이유는 첫째, 내가 사이프러스에 한국인 친구 커플이 있었기 때문에 사기라면 현지의 도움을 충분히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고, 둘째, 전화통화를 하면서 나만 이 사람이 사기꾼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호스트도 내가 사이프러스 투하니코리빙에 맞을 사람인지 아닌지를 가늠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서 였다. 이 사람, 코리빙에 진심이다. 물론 나도 그렇고.
하지만 코리빙을 찾는 이들은 항상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전세계 디지털노마드들 사이에서 코리빙이 핫한 키워드가 된지는 좀 되어서, 어느 곳이나 코리빙이라는 이름을 걸고 사람들을 끌어모으려는 노력들이 있고, 코리빙을 프랜차이즈처럼 다양한 장소에 공장처럼 찍어내는, 건물만 있으면 코리빙이라고 불러도 되지, 하는 사업가들도 있는데 나는 그런 곳은 추천하지 않는다. 까닥하다가는 준비도 안된 공사 중인 숙소에 이미 돈을 다 보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실제로 내 브라질 친구 커플이 겪은 이야기다. 다행히 모두 환불을 잘 받았지만, 얘네도 당시에는 까마득했다고 한다. 이미 돈을 다 냈는데 도착하니까 거짓말 안 보태고 똥냄새가 진동하는 공사중인 건물이더란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시간이 좀 걸리기는 했지만 다행히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아 거기서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운이 좋았던 케이스니까 항상 이렇게 잘 처리가 되기를 바라지 말고 처음부터 조심하는 게 좋겠지.
사이프러스 투하니코리빙은 모든 방이 화장실을 갖추고 있는 개인실이다. 오래된 건물을 개조해서 코리빙으로 쓰는 거였는데, 주방이 특이했다. 교실에 각자의 책상이 있는 것처럼 넓은 주방에 각자의 가스레인지에 후라이팬에 냄비가 주어지는. 나는 거창한 요리를 하지는 않았고 주로 샐러드를 많이 해먹었는데, 사이프러스가 세상에, 올리브오일하고 할루미치즈 맛집이다. 와인을 좋아한다면 와인도 끝내준다.
나는 할루미치즈를 한국에 있을 때는 잘 몰랐고, 호주에 있을 때 처음 먹어봤다. 굽거나 튀겨서 먹는데 어찌나 바삭한데 쫄깃하고 맛있는지 그 이후로는 할루미치즈가 있으면 꼭 사다가 샐러드로 올려 먹었다. 사이프러스는 그리스의 영향이 커서, 할루미치즈가 정말 다양하게 많았는데, 스페인에서는 페타치즈나 모짜렐라가 이렇게 다양하게 많지 할루미치즈는 찾기가 어려웠던걸 사이프러스에서 보니 할렐루야였다.
사이프러스가 전반적으로 그렇지만, 특히 투하니코리빙이 위치한 곳은 차가 없으면 이동이 불편한 곳이었다. 도시에서는 살짝 떨어진 교외지역에 위치해있고, 주변은 걸어서 다니기엔 쉽지 않았다. 예약할 때에 나와 통화를 했던 크리스티는 코리빙 주인이었고, 커뮤니티매니저를 담당하는 사람은 실버라는 스페인 여자애였는데, 나이는 이십대 초반인데 어쩜 이렇게 어른스럽지 하는 생각을 들게 하는 사람이었다.
커뮤니티매니저에게 전담으로 주어지는 코리빙차량을 타고 우리는 장도 보러가고, 아침에는 각자 일을 시작하기 전에 가장 가까운 도시의 해변으로 가서 수영도 했다. 사이프러스의 바다는 정말 너무나 아름다운데, 아쉽게도 우리가 아침에 수영하러 가는 곳은 예쁜 곳은 아니었다. 아이야 나파나 파포스로 가면 와 미친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인가 하고 느낄 정도로 아름다운 바다들이 있으니 기회가 되면 꼭 가보시라.
나는 실버하고 둘이서만 시간을 몇 번 보냈는데 그녀의 가장 두드러지는 어른스러움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아이같음에서 흘러나옴을 목격했다. 우리는 상대방과 대화를 하면서 저게 무슨 뜻이지? 하고 말의 숨겨진 뜻에 대해서 고민을 할 때가 있는데,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말의 이면을 생각하지 않고 표면값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지레짐작과 나의 판단을 덜어내고, 이해가 되지 않으면 바로 다시 물어본다. 거기에 해맑은 웃음과 부끄러움이 없는 행동을 더한다. 그게 실버였다.
주말 중 하루는 실버와 둘이 멋있다는 바다를 찾아 나섰다. 절벽같이 보이는 곳에 가까이 가서 차를 세우고 우리는 길을 따라 내려가니 파도가 치는 작은 해변이 나타났다. 와이씨 이런 곳이 있는 걸 얘가 아니면 내가 알 수가 없겠구나, 감탄하면서 바다를 쳐다보는데. 실버가 옆에서 씨익 웃더니 옷을 훌렁훌렁 벗는다. 누가 스페인애 아니랄까봐. 그러고는 바다로 뛰어간다. 질 수 없지. 나도 훌렁훌렁 벗어제끼고 바다에 들어가서 크큭 거리며 같이 웃었다. 석양이 떨어지는 모습이 진한 오렌지 빛깔이 실버도 나도 검은 실루엣으로 만들었다. 남기고 싶어. 이 아름다움을 어떤 형태로든 붙잡고 싶어.
나는 물 밖으로 뛰쳐나가서 핸드폰을 집어들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다시 물 속으로 돌아오고 이번에는 실버가 내 사진을 찍어줬다.
“바다의 파도소리가 음악같아. 태양이 조명이고, 이 곳이 이 자연이 우리의 무대가 된 것 같아.”
낭만적인 말들을 서로 쏟아내며 우리는 해변가 돌들 위에서 태양 조명의 부드러운 오렌지빛 아래에서 몸을 움직였다. 우리의 몸짓은 춤이 되었다. 조명이 수면 아래로 꺼질 때 까지 우리는 발가벗은 몸으로 찬란한 그 빛들을 받아냈다. 너무 재밌어. 최고야. 바다가 있고 너가 있고 나도 있고 우리가 하나가 되어 느끼고 움직이는 지금 이 순간이.
평일에 일을 하며 자연의 존재를 까맣게 잊었다면 이렇게 연결되는 시간이 있어야지. 왜 이게 나는 한국에서 어려웠을까. 한국에 자연이 없는 것도 아닌데. 심지어 내가 서울 살 때는 석촌호수도 가까웠고, 대전에 살 때는 바로 코 앞에 뒷산도 있었는데. 뭐가 문제지? 그런데 돌아보면 문제가 있었어. 자연을 온전히 자연으로 느끼고 숨을 천천히 쉴 적당한 속도의 삶이 적어도 나에게는, 한국에서 없었다. 아무리 내가 천천히 가려고 노력해도 어딜가나 느껴지는 다른 한국인의 자국들이 내가 천천히 숨을 쉬고 자연 속에서 춤추기 전에 움츠리게 되더라. 한국인의 자국이라고 말해서 일반화하는 게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잣대가 센 것은 누구나 어느 정도 인정하는 부분이지 않을까, 하고 얘기한 것이니 한 번만 넘어가줘요.
내 몸짓이 어느 모양이든, 얼마나 우스꽝스럽든, 내 몸의 어느 그 부분이 덜렁거리든 출렁거리든 간에 그저 나는 내 몸이 나를 이끄는대로, 태양빛이 나를 비추는대로 움직이고, 그러다보면 그저 빛으로 가득한 자연과의 하나된 에너지가 흐르는 나를 느낄 수 있다. 나중에서야 나는 이 움직임이 나의 명상과 닿아있음을 알았지만.
나는 생일을 광고하고 다니거나 크게 챙기는 사람은 아니었어서, 투하니코리빙에서 생일을 보내게 되었을 때에도 같이 지내는 사람들에게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저녁에 실버가 비건 케이크를 만들어서 모두가 촛불을 켜고 고무줄 달린 꼬깔 모자를 들고 내 앞에 나타났다. 오후에 만들었대. 아이고 고마워서 어쩜 좋지.
생일 촛불을 불고 소원을 빌고 케이크를 나누어 먹었다. 무슨 소원을 빌었냐고 물어본다. 그래서 나는 내 생일날 오전부터 쓴 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생일이 뭐 특별한가 365일 중 하나의 날일 뿐이지 했던 태도를 바꿔서 이제는 의미부여를 해보기로 했다고.
“사실은 이번 생일부터는 일년의 테마를 정해볼까 해.”
우리가 연말이나 새해가 되면 일년의 계획을 세우는 사람들이 많잖아. 올해에는 무엇을 해야지 하고 결심도 하고. 그런데 나는 생일을 기준으로 나의 35번째 해에 테마가 될 단어를 정해서 그 단어를 따라 살아보련다는 결심을 들려주었다.
“그래서 올해의 단어는 ‘실험’(Experiment)이야.”
나는 굉장히 나에 대한 주관이 강한 편이고 이미 고정된 것들이 많거든. 여행을 한지가 오래되어서 나는 그 강한 주관들이 그래도 좀 유연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친구들하고 최근에 얘기를 하다보니 꼭 그것도 아닌 것 같거든. 지금 내가 갖고있는 나의 성격이나 성향들이 나와 정말 맞는 것인지 내 본연의 모습이 맞는지 의심되기 시작했어. 그래서 본격적으로 실험해보고 흔들어보는 걸 해봐야겠더라고. 이미 변한 내가 맞지 않는 강한 주관들을 붙잡고 있는 것일 수도 있잖아. 나는 계속 새로운 정보를 받고 있고, 계속 진화하는데 기존의 공식이 계속 통하는지를 어떻게 알겠어. 실험을 해봐야지. 그리고 지금의 나에게 가장 잘 맞는 공식을 다시금 찾아내야지. 안 그래?
그렇게 1년 간의 사이클을 두고 실험을 해볼거라고. 예를 들어 여행계획을 거의 1년치를 미리 세워놓고 플랜 B, C를 생각하는게 마음이 편한 사람이 나라고 생각했는데 미리 길게 최대 3개월 이상은 내다보지 않는 걸 실험해볼 것이고. 아침 루틴도 이게 정말 최적인지 이것 저것 다시 다양하게 시도해볼 것이고. 주저리주저리 나의 실험 계획들을 들려주었다. 이미 실험을 생각하고 있는 것들 외에도 망설이는 결정이 있다면 어느 쪽이 실험에 맞는가를 생각하고 결정할거라고. 나의 테마가 되는 단어는 일년의 주제와 방향이고,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 될 거라는 것을 설명했다.
친구들은 소원이 뭐냐는 질문에 내가 이렇게 길게 대답을 할 것이라고는 예상을 못했던 것 같다. 잠깐의 침묵을 깨면서 누군가가 말했다.
“그거 되게 멋있는 생각이다.”
히히힣, 고맙다 친구. 내가 생각해도 좀 멋있긴 했어. 그렇게 나는 9월의 어느 날에 실험적인 삶을 살아보자, 35번째 년도는 그렇게 사는거다, 하는 생각을 붙들었다. 그 다음 9월이 되기까지. 실험은 나의 삶을 지배한 단어가 되었고, 이렇게 나의 생일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출발점으로, 중요한 기점으로 바뀌었다. 이제는 생일이 가까워지면 생일이 되지도 않았는데 올해는 무슨 단어가 나한테 와서 콱 박힐까 하고 기대하게 된다. 이 새로운 전통을 하기 싫을 때까지는 재밌게 해나가야지.
<챕터 5에는 실리지 않은 사이프러스의 이야기들>
* 와인 페스티벌
* 와이너리 투어 - 드라이한 모스카토라니?
* 폭포 하이킹 눈누난나
* 한국인 친구들의 초대
* 승마, 취미로 괜찮은데?
* 아이야나파(Aiya Napa) 당일치기
* 스파에서 마사지 받고 뻗어버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