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16. 일과 직업, 소명 사이 그 어딘가
스페인 겨울을 떠나 나는 쉥겐 90일을 꽉 채우고 멕시코로 왔다. 멕시코에서는 스위스 알피니스코리빙에서 만난 노엘과 프랑스 클라우드시타델에서 만난 마이크의 초대로 오하카(Oaxaca) 코404(Co404)코리빙에서 지낼 예정이었다. 이 커뮤니티중심의 코리빙 세계는 상당히 좁은 편이라, 나에게 초대장을 각각 보냈던 노엘과 마이크는 이미 서로 아는 사이로, 둘은 12월부터 멕시코에 있었다.
멕시코에서의 계획은 노엘과 야외로 클라이밍을 다니고, 일은 일대로 하고, 2019년 칸쿤 이후로 멕시코는 처음이니까 타코 많이 먹고 관광도 좀 할까? 했는데 웬걸. 노엘은 귀국예정일을 바꿔서 미국으로 돌아가야했고, 나는 새해 첫 회의 때 잘렸다.
스위스 포스트에서 언급했던 세가지 일중에 첫번째 일. 가장 일한 지 오래됐고 나의 사명은 아니었지만 세상에는 중요한 일이었고, 내가 충분히 잘해왔던 일. 솔직히 잘릴 거라고는 전혀 예상을 하지 못 했어서 놀라기는 했다. 난 내가 잘릴 가능성이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터라.
잘리고 나서 내가 알게 된 것. 나는 내 일과 감정적인 면에서 큰 애착이 없었다는 것.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괜찮을 수가 없다. 안그래도 일을 하나 그만둬서 수입이 줄어들었는데 하나가 더 줄어들면 수입이 거의 없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왜 아무렇지도 않을까. 왜 걱정이 안될까. 코로나동안 저축해놓은 돈으로 앞으로 1-2년 정도는 일을 안해도 버틸 수는 있겠지만. 이젠 뭐하지?
과거의 나와 작별인사를 하고 나서도 아직 내 삶에는 내가 아닌 것들이 남아있는데, 내가 스스로 떨궈내지 않을 것들을 우주가 나서서 나를 위해 떨어내고 있는 것 같아. 나에게 안정감을 주는 이 일을 나는 절대 내 손으로 그만두지 않았을 거다. 내가 둥지에서 떨어져나가서 날 수 있게 우주가 내 등을 떠밀었다. 나는 항상 내 개인 열정 프로젝트로 여겼던 하나 남은 일을 제대로 해보기로 결심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책 읽는 걸 많이 좋아했다. 어렸을 때 이웃집에 남자형제가 사는 집이 있었는데 그 집에 가서 맨날 책을 읽었다. 그 집 아주머니는 엄마하고도 친해서 지금도 식사를 같이하면 아유, 너가 우리집에 와서 그 책들을 다 읽어서 그게 돈이 안 아까웠어~ 하신다. 초등학생 중학생 때는 독서과외를 했다. 책을 같이 읽고 이야기할 사람이 없어서 선생님이 집에와서 나와 토론을 했다. 그러면서 대학생이 되고 성인이 되니까 어느 순간부터 문제가 생기면 사람에게 달려가지 않고 책을 찾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책으로 배운다는게 나에게는 너무 자연스러웠다.
책으로 배우는 건 책을 읽는다고 바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책의 내용에 비추어 내 모습을 살펴보고 어떻게 바꿔나갈지를 고민해보고 실천할 것을 체크하고 작은 한가지일지언정 해보고 잘 안되면 또 실천할 것을 찾고, 잘 안되면 왜 잘 안되는지 문제의 뿌리를 찾아보고 하는 과정은 짧지 않다. 소설을 읽을 때에도 내가 느끼는 감정과 생각의 뿌리를 따라가는 작업은 생각보다 큰 인내심과 끈기, 용기를 필요로 한다. 아주 쉽지도 않고. 그래서 난 이걸 같이 할 사람들을 찾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북클럽 회사에 들어갔다. 원서를 읽고 영어로 이야기를 나누는 북클럽 세션을 진행하는 일을 2년간 했다. 영어로 위의 과정을 거치는 것은 우리말로 진행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가 있다. 내가 자라오면서 상처가 나있는 언어가 아닌 새로운 언어. 나를 객관화하기에 훨씬 쉬운 언어. 내가 자라면서 함께한 언어가 아니라서 내 모국어로는 나를 다시 사랑하기가 어려운데, 새 언어로는 나를 사랑하기가 조금은 더 쉽다는 걸. 그 과정을 지나면 내 모국어로 나를 사랑하는 것도 덩달아 쉬워졌다. 영어는 나에게 그런 의미가 생겼다. 그래서 회사에서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세션들을 모두 닫기로 결정했을 때에도, 회원분 몇 분이 계속 이어서 하고 싶다고 했을 때, 나는 사업자를 내고 이것을 내 부업side hustle으로 삼았다.
멕시코에서는 그래서 해고 통보 이후에 일자리를 구하는 대신에 내가 부업으로 삼은 이 일을 확장하는 것에 목표를 두기로 했다. 확장을 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뭘까, 어떤 일들이 필요한가를 하나씩 적어갔다. 잘 안 되면, 직업은 그 때 구해도 되지, 하고 책상에 앉아있는 외의 시간에는 놀았다. 시원하게 놀아야지. 야외 클라이밍을 노엘과는 갈 수 없었지만, 새로운 친구 이브랑 갔다. 알고보니 이브는 내가 프랑스 알프스에서 지냈던 클라우드시타델 코리빙을 떠나자마자 도착해서 나와 겹치는 친구가 많았는데 우연인지 아닌지 나와 같은 코404코리빙에 한 달을 머물게 된 것. 뉴욕에서 온 이브는 스탠드업코미디도 해서 코리빙 탤런트쇼에서 1등을 하기도 했다. 미친듯이 웃긴 친구를 갖는 것도 내 복이다. 여러분, 나를 웃게 만드는 친구가 어마어마하게 귀한 친구입니다.
코404코리빙은 다른 코리빙과는 다르게 다수의 자원봉사자를 두는 시스템이었다. 대여섯명 정도가 자원봉사자로 일하고 일주일에 6시간 쉬프트를 두 번, 일주일에 한 번의 야외활동을 기획한다. 자원봉사자는 무료로 숙박을 제공받는다. 나는 한 달 동안 여러 가지 활동에 참여했는데, 아침에 하는 모닝요가를 시작으로 우리나라로 치면 전통 사우나인 테메즈칼, 1박2일 폭포투어, 초콜렛투어, 주말마켓 등등. 뭐하고 놀지를 굳이 고민하지 않아도 여기서 우리 이렇게 놉시다~ 여기로 모이세요! 하는 자원봉사자들이 있다. 얼마나 편했는지.
이전에 지내던 코리빙보다 규모가 훨씬 커서 머무는 인원수도 많았다. 다른 코리빙들은 주로 12명에서 20명 안쪽이었는데 여기는 거의 30명 가까이 되었던 듯. 내 기준에서는 좀 과한 편이었지만 어차피 모두와 다 친하게 지낼 건 아니니 괜찮았다.
다만 멕시코에 오니 중미의 특징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달까. 중미의 국가들 중에서도 멕시코는 물가가 싼 편이라 그 점은 좋았지만, 중미의 국가들은 전반적으로 공기의 질이 매우 좋지 않다. 어디든 자동차가 많은 곳이면 매연의 냄새가 진하게 느껴졌다. 나는 냄새와 소리에 나름 민감하다고 하는 편이라 이 점은 아쉬웠다. 그렇다고 인터넷을 버리고 자연으로 가기는 어려우니까.
나는 언제 다시 멕시코에 돌아올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