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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과테말라, 불을 뿜는 활화산의 에너지

챕터 17. 나를 더 격정적으로 사랑하라는 대지의 에너지

by 노마드 써니

멕시코에서 한 달을 마무리하고 나는 과테말라로 날아갔다. 노엘과 마이크가 멕시코로 오라고 했을 때, 나는 바로 과테말라를 떠올렸었다. 과테말라에서는 2월에 아크로탄트라 페스티벌이 있다. 작년에 처음으로 만났던 아크로탄트라. 나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하고, 가슴을 열어젖히게 했던 아크로탄트라. 아 멕시코 갔다가 과테말라 가면 되겠다. 퍼즐 조각이 딱 들어맞는다. 그렇게 아크로탄트라 페스티벌 예약 완료. 난 이런 순간들을 좋아한다. 내 무릎에 맞는 퍼즐 조각들이 하늘에서 똑하고 떨어져 나와서 알아서 지들끼리 맞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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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테말라시티 라 오로라 공항, 그리고 내가 떼먹힌 돈 ATM 이 강도가 될 줄이야


과테말라시티 공항은 의외였다. 스페인어, 영어, 그리고 한글로 도착(Arrival)이 적혀있다니. 여기 뭐지? 시작은 그렇게 했는데 도착한 그날 하루가 정말 나에게 이런 시련을 가져다줄 줄이야. 내가 도착하는 날 과테말라시티에 오는 다른 아크로탄트라 친구 두 명을 만나서 우리는 택시를 같이 타고 가기로 했다. 페스티벌 예약을 할 때 안내사항으로 현금을 준비해 오라고 되어있었는데, 나는 ATM 기로 현금을 뽑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별생각 없이 다른 통화로 현금을 별도로 준비해오지 않았었다. 그렇게 도착해서 같이 가는 두 명은 멕시코 페소를 들고 왔어서 은행에서 현금을 교환하고 나는 현금을 인출하려고 은행이 있는 쇼핑몰로 향했는데, ATM 기에 카드를 넣고 현금인출을 시도했을 때 사달이 났다. 인출 버튼을 착착 다 누르고 나서 기기에서 '서비스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메세지가 뜬 이후로 그대로 멈춰버린 것이다. 10분이 넘게 ATM 기기는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더니 카드를 뱉어내고는 현금은 내놓지 않았다. 이게 뭐지? 영수증이고 뭐고 없고 카드만 뱉어냈다. 황급히 핸드폰으로 나의 신한은행앱을 체크했다. 내 계좌에서는 현금이 빠져나갔다. 순간 머리가 하얗게 되고 헛웃음이 나온다. 아니야, 아닐 거야. 아니긴 뭐가 아닌가. 내 돈이 그렇게 사라졌다.


불행 중 다행인지 뭔지, 토요일 오후 4시인데 과테말라 은행은 열었더라. 천만다행인 게 내가 사용한 ATM 기기가 은행 바로 앞에 있는 것이어서, 나는 은행으로 들어가 스페인어 번역기를 켜고 도움을 요청했다. 은행원이 내 카드를 받고 조회를 하더니 자기네 측에서는 서비스가 완료되지 않은 것으로 나온다고, 인출 진행이 되지 않은 것이라는 종이를 출력해 줄 테니 한국에 있는 은행에 직접 요청해서 처리해야 한다고 그런다. 하, 내 돈 내놔. 일단은 종이를 받아 들고 나왔다. 거기에서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준 거니까 남은 건 내가 해야지. 당장은 인터넷이 너무 느리기도 해서 다른 걸 할 수가 없으니 인터넷이 괜찮은 곳에서 알아보자. 지금은 내가 이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다. 숨을 깊게 내쉬었다. 이 돈이 없다고 내가 죽는 것도 아냐. 생활이 달라질 것도 아냐. 괜찮다. 돌아올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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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틀란 호수, 호수 바닥에는 고대의 사원이 가라앉아 있다고


페스티벌 장소는 아티틀란 호수(Lago Atitlan)의 마을 중 하나인 추누나(Tzununa)에서 열렸다. 내가 페스티벌 전에 머문 숙소는 호수 바로 앞에 있었는데, 밤에 늦게 도착한 탓에 어두워서 하나도 보지 못한 호수가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 그냥 보통 장소는 아니구나, 하는 게 느껴졌다. 엄청나게 깊은 호수, 바다같이 넓고 큰 호수긴 한데 그뿐은 아닌 것 같았다. 페스티벌 첫날에 행사장소에 들어서자마자도 분위기가 무엇인지 모를 것이, 땅에서 흘러나오는 에너지가 나를 압도했다. 아크로탄트라 이벤트가 처음도 아닌데, 도대체 이게 뭐지?


아크로탄트라 페스티벌은 코스타리카에서의 개더링이랑은 차이가 있었다. 열다섯명 남짓 했던 개더링과 백명에 가까운 페스티벌이 인원수가 다른 것도 이유지만, 코스타리카의 정글이 주는 기운과 활화산과 칼데라호수가 주는 기운이 다른 게 느껴졌다. 과테말라에서는 페스티벌이고 사람도 더 많아서 프로그램도 같은 시간에 세 가지로 선택의 폭이 넓었다. 두 레벨의 아크로요가 워크숍과 한 개의 탄트라 워크숍 중에서 선택할 수 있었는데, 내 몸이 여러 개여서 동시에 듣고 싶은 때도 많았다. 코스타리카와 똑같이 동의의 바퀴(the Wheel of Consent)나 어쎈틱 릴레이팅(Authentic Relating)도 있었지만 동의의 바퀴는 제스가 아닌 공동창업자 아다가 진행하고, 어쎈틱 릴레이팅은 매일 다른 테마로 총 다섯 번에 걸쳐 전문강사인 애쉬가 워크숍을 진행했다. 아크로요가도 물구나무서기(핸드스탠드, Handstand), 시바리 아크로 (Shibari Acro), 킹키 아크로(Kinky Acro), 플로우 만들기, 팝, 이카리안(Icarian), 캐스트어웨이 등등 레벨과 가르치는 트릭이 다양했고, 탄트라도 래디컬 셀프러브 플레이샵(Radical Self-Love Playshop), 쉐도우 스토킹, 신성한 터치(Sacred Touch), 쿤달리니 요가 등 내가 모르는 것들이 한가득이다. 아 진짜 너무 기대돼. 뭘 배울지 벌써부터 짜릿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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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숍 일부분


코스타리카에서 만났던 제스, 사라, 마테이 모두 너무나 반가워서 꽉 껴안았다. 압도당한 내가 반가운 얼굴들을 보니 풀어져간다. 마음이 열린다.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들을 여기서 더 만나겠구나. 아크로탄트라에서는 배움도 배움이지만 이 배움을 함께 나누고 함께 노는 사람들도 찐하다. 찐이다.


래디컬 셀프러브 플레이샵은 참석 전부터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실제로 워크샵에 참석한 인원도 많았는데, 워크샵을 진행한 요세프는 스스로를 어떻게 사랑할지를, 어떻게 더 적극적으로 사랑할지를 우리가 연습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워크샵에 참석한 사람들은 셋씩 그룹을 만들고 세 단계에 걸쳐서 연습을 했다.


한 사람이 연습을 하는 동안 두 사람은 옆에서 서포트해주고 그 사람을 그대로 담아내는 그릇의 역할을 하는 방식이었는데, 1단계에서는 연습을 하는 사람이 자기 스스로에 대한 고백을 한다. I am, I do, I was, I did 으로 시작하는 과거와 현재의 나의 모습, 행동, 상태, 느낌에 대한 것들을 이야기한다. 상처받은 모습도,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사랑하고 싶지만 잘 되지 않는 부분도 우리에게는 있다. 한 가지씩 꺼내놓을 때마다 옆에 앉은 두 사람은 '그렇지! 우린 너의 그 점을 사랑해(Yes! We/I love that about you)’하고 진심을 담아 말한다. 나는 올리비아, 루카랑 팀이 되었는데 첫 번째로 시작한 올리비아가 한 꺼풀 한 꺼풀 자신을 드러낼 때마다 지난 해에 배운 산이 되는 것을 떠올렸다. 나는 그 모습을 예뻐해주고, 사랑해주고, 응원했다. 올리비아의 드러내는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신이 날 정도였다. 예스! 하고 소리치며 만세를 불렀다. 울음이 맺히는 올리비아와 함께 우리는 웃음이 터졌다. 고마웠다. 내 앞에서, 또 스스로의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그가 고마웠다.


올리비아와 맞잡은 손, 사랑을 흘려보냈다


2단계로 넘어가면 연습을 하는 사람이 자신에 대해서 더 꺼내놓으면서 한 문장을 추가한다. ‘나는 나의 이 점을 사랑해(I —, I love that about myself)’하고. 올리비아가 자신에 대한 사랑을 고백할 때마다 그렇지! 잘한다! 맞아! 우리도 그걸 사랑해! 하고 우리는 박수를 쳤다. 사랑고백을 축하했다. 스스로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이는 얼마나 아름다운지.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3단계에서는 이제까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이 용기있는 사람에세 내가 지금 어떻게 너를 응원할 수 있을지, 너를 잡아줄 수 있을지, 너의 곁에 있을 수 있을지를 물어본다. 연습을 한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방식을 얘기해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연습한 사람은 자신을 응원해준 두 사람의 사랑을 깊이 느낀다. 올리비아는 손을 잡아달라고 했다. 그리고 안아달라고. 루카와 나는 올리비아의 손을 잡았다. 손의 온기 안으로 사랑을 흘려보낸다. 올리비아를 품에 안았다. 셋이서 우리는 그렇게 한참 사랑을 나누었다.


나를 사랑하는 고백의 시간. 그리고 그 사랑을 담아내는 그릇이 되는 시간. 아, 또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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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아크로탄트라 페스티벌 스케쥴


‘점을 연결하기(Connect the dots)’라는 워크샵도 인상적이었는데, 내가 기존에 하던 스트레칭을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몸의 여러 부분에 점이 있다고 생각하고 어느 점에 초점을 맞출지를 정하면 동작을 할 때의 느낌이 달라지는 것을 연습했는데, 너무 신기했다. 예를 들어 내 가슴 밑 갈비뼈 양 쪽에 점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두 점을 수축하는 것에 집중을 해서 상체를 굽히는 것과, 갈비뼈의 뒷부분 등에 두 점을 앞면과 같은 위치에 두고 이를 펼치는 것에 집중을 해서 상체를 굽히는 것을 비교해보면 몸이 느끼는 것이 완전히 다름을 알 수 있다. 와. 뭐 이런게 다있어. 이런 걸 어떻게 알았지? 겉에서 보면 그저 상체를 숙이는 똑같은 동작인데, 나의 의도에 따라서 내 몸이 느끼는 바는 달라진다.


의도. 나의 뜻. 나의 방향. 마인트풀니스(mindfulness). 나의 마음의 길을 따라 나의 몸도 느끼는 것이 달라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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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못할 아크로탄트라 2024


일주일의 페스티벌 뒤에 나는 혼자서 지낼 마을로 이동했다. 멕시코에 있을 때부터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이 수면 위로 떠올랐는데, 페스티벌 이후에는 더 선명해졌다. 일주일의 대부분은 혼자서 지내고, 금요일, 토요일은 친구들이 있는 마을에 가서 아크로 연습도 하고, 무료 쿤달리니 요가도 가고, 호수에서 수영도 하고 자유롭게 지냈다.


아무 것도 특별히 하지 않으면서 혼자서 보내면서 나는 노트정리를 했다. 페스티벌동안의 워크샵 내용 정리도 하고, 느낀 것들에 대해서도 기록을 했다. 아크로탄트라가 나에게는 첫 페스티벌이었는데, 디지털노마드 친구들 중에는 포르투갈에서 노웨어 페스티벌이나 붐페스티벌, 아니면 미국에 버닝맨, 아크로요가 친구들은 유럽과 아메리카 전역의 다양한 아크로요가 페스티벌을 다니는 걸 알고 있었다. 막상 내가 가보고 나니까 이제는 조금은 알 것 같은거지. 왜 그 친구들이 매년 휴가를 내서 페스티벌을 가는지. 이 시간이 일로부터는 휴식이지만 동시에 개인 뿐 아니라 함께 하는 배움이고 성장인 것을.


처음에 혼자 있는 시간을 계획할 때에는 원래 북클럽에 대한 개발을 많이 하고 싶었는데 그러지는 못했다. 나는 계속 잠을 많이 잤고, 천천히 책을 읽거나 쉬는 시간이 많았다. 시간이 많은데 왜 해야 할 일을 잘 못하지? 내가 하고싶은 일이고, 보람도 있고, 좋아하는 일이 맞는데 이상하게 무얼 해도 진도가 안 나가고 동기부여가 잘 되지 않았다. 호수마을을 떠나 안티구아로 옮기고 나서도 이 부분은 잘 나아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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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건 하지만


스위스 알피니스코리빙에서 만난 노엘은 원래 나와 멕시코에서 만나기로 했었지만 노엘이 급하게 미국으로 돌아갔어야 했어서 1월에 못 만나고 3월이 되어서야 과테말라에서 다시 만났다. 우리는 방을 여러 개 에어비앤비로 내놓은 집에 나란히 예약을 해서 지냈다. 외에도 캐나다에서 온 비즈니스 코치 소피아와 연애관계 코치 엘레나, 그리고 미국에서 온 안드레아까지, 에어비앤비가 마치 코리빙처럼 돌아갔다.


안티구아는 멕시코 오하카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다. 조금 더 시골스럽고 사람이 조금 덜 복작이는 느낌이랄까. 집에는 옥상에 넓게 의자와 테이블, 편안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어서 방에서 뿐 아니라 일을 하기에는 충분했다. 노엘은 중요한 미팅이 있을 때에는 코워킹으로 갔지만 나는 집에서 주로 일을 했다. 최소한의 해야할 것들은 하지만 멕시코에서 해야할 일로 적어놓은 것들을 제대로 하기는 쉽지 않았다. 방향에 대한 확신도 딱히 없고, 해야할 것은 많은데 무엇부터 시작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고, 무엇보다 무언가를 해낼 힘을 쓸 엔진이 켜지지 않는 느낌. 지난 5년간 그래도 거의 쉬지 않고 일을 해왔으니 모처럼 찾아온 휴식이 더 필요한 거겠거니 하는데 그때마저도 이 휴식의 끝에 과연 내가 다시 마음 잡고 열정을 부을 일이 잘 자리잡고 있을 것인지는 모르겠더라.


그냥 다 모르겠고. 뿌옇고 하루하루가 지나가기는 하는데, 여기가 재미있기는 하지만 뭔가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는 냄새가 강하게 났다. 그래도 온 김에 할 건 해야지. 안티구아에서 절대로 빼놓지 말고 해야할 것은 바로 활화산 등반이다. 안티구아 도심에서도 맨눈으로 보이는 푸에고(Fuego)는 활화산, 그 바로 옆에 아카테낭고(Acatenango)는 휴화산인데, 푸에고는 끊임없이 매일매일 폭발이 쉬지 않고 일어나서 안티구아의 공기질에 크게 영향을 끼치는 중이기도 했다. 눈 앞에서 마그마를 뿜는 데를 내가 언제 가보겠어. 온 김에 가야지, 하는 생각에 노엘, 노엘의 친구 필, 나 셋은 1박2일의 아카테낭고 하이킹 투어를 예약했다.


하이킹은 생각보다 많이 힘들었다. 해발 2400미터에 위치한 등산로 입구에서 시작해서 해발 3100미터 베이스캠프까지 올라가는데 세상에나 무엇보다 숨이 너무 찼다. 짐도 가볍게 쌌는데 도대체가 다른 사람들처럼 걸을 수가 있어야지. 올라가다가 쉬고. 같은 투어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내가 안쓰러웠는지 자기들이 돈주고 빌린 지팡이도 나에게 빌려줬다. 그래도 자꾸 뒤로 쳐지고 따라잡지를 못하던 나는 결국 가이드들의 짐운반 서비스를 이용하고 맨몸으로 올라갔다. 맨몸으로 올라가니까 훨씬 나았다. 2키로 내외의 짐인데도 이렇게 차이가 크다니. 그런데도 꼴찌였다. 안 죽은게 어디야. 그래도 올라왔네. 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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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다살아남


올라와서 점심밥을 먹었다. 아카테낭고 베이스캠프 정면에는 푸에고(Fuego) 산이 눈에 들어오는데 연신 뿜어져나오는 화산재 연기가 보인다. 베이스캠프에서 쉴 사람들은 쉬고, 오후하이킹을 가는 사람들은 잠시의 휴식 뒤에 푸에고도 오를 참이었다. 나는 안 가기로 마음을 먹었고, 노엘과 필은 낮잠을 자고 일어났다. 나도 눈을 잠깐 붙였다. 서서히 날이 어두워지고 해가 져가는데 낮동안에는 연기만 보이던 푸에고 정상에서 빨간 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폭발음이 땅이 흔들릴 정도로 나고 정상에서 산자락에 조금씩 보이던 빨간 빛이 이제는 정상 위로 솟아오르는 모습까지 선명하게 보인다. 모두들 넋을 잃고 바라만 본다. 활화산의 모습을, 그 힘을 그저 바라만 본다. 그 거대한 에너지를. 불을 쳐다보면서 불멍을 한다는데, 화산멍을 때린다. 이런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 이 에너지는 어디로 갈까. 이렇게 품어내듯이 나도 무언가를 할 수 있을까. 사는 걸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사랑을 이렇게 할 수 있을까.


내려오는 길은 올라가는 길과는 비교도 안되게 쉬웠다. 다리가 길쭉한 노엘하고 필은 내려오는게 훨씬 힘들었다고 그러는데, 작은 나는 어떻게해야 편하게 내려오는지를 터득하고 나니 거의 뭐 달려 내려왔다고 해도 될 정도였다. 허벅지에 힘을 딱 주고 발목에도 니은자로 고정시킨 상태에서 또 힘을 딱 주고 모래가 듬뿍 쌓인 길을 발 뒷꿈치로 눌러가며 모래바람 일으켜가며 수욱 수욱 내려와버렸다.


산을 내려온 이후로는 또 평소처럼 보냈다. 일어나서 북클럽 영상통화, 강아지 산책, 마켓가서 장보고, 요리해먹고, 책 읽고. 한 집에서 같이 지내는 이들과도 꽤 가까워져서 같이 저녁을 먹으러도 가고, 쇼핑도 다니고 하며 대화가 잦아졌다. 안드레아는 나하고 나이가 비슷하지만 소피아와 엘레나는 이십대 중반으로 나보다 열살 가량 어렸는데, 이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다보면 신기했다. 나는 이 나이에 진짜 뭘 몰랐는데 얘네는 어떻게 알지. 나는 긍정적인 태도로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생각보다 비관주의적인 부분이 있어서, 세상은 마냥 아름답지 않고, 후대에게 물려줄 이 지구가 점점 더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소피아와 엘레나를 보면 뒷세대에 희망을 가져도 될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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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구아 집 옥상. 멀리 연기를 내뿜는 푸에고도 보인다


활화산을 걸으며 에너지도 나에게 끼얹었겠다, 나에게 희망을 느끼게 하는 이 젊은이와 이야기를 해보자고, 그래서 소피아에게 혹시 나와 미팅을 할 수 있는지를 물어봤던 것 같다. 안 그랬으면 시간을 내서 따로 얘기를 하자고 하지는 않았겠지. 처음 만났을 때 서로가 하는 일에 대해서, 왜 과테말라에 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얘기하면서 비즈니스 코치를 하는 소피아가 지나가는 말로 툭 던졌었는데, 나는 더 늦기 전에 그 말을 잡은 거다.


“언제든 비즈니스 관련해서 얘기하고 싶으면 말해.”


미팅을 위해서 소피아가 좋아하는 간식과 탄산수를 준비하고 앉았다. 무슨 얘기를 하게 될까. 소피아는 이미 내 북클럽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는데. 무슨 질문을 나에게 던질까. 그런데 소피아는 대화 중에 정말 내가 생각지도 못한 걸 물어봤다.


써니 넌 꿈이 뭐야?


어? 잠깐만. 꿈? 비전도 있고 이유도 있고 다 있는데, 그런데 나는 꿈이 뭐냐고. 그 꿈 안에서의 나의 일의 역할, 위치를 물어보는데 나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꿈이 있냐니. 말 없이 시간을 되돌려서 내가 꿈을 가졌던 마지막 시점이 언제인지를 되돌아보니, 호주에 정착하겠다, 뉴질랜드에 정착하겠다, 그렇게가 마지막이었던 거다. 꿈이라는 게 무엇이 되겠다, 어렸을 때 적는 장래희망 같은 것이 아니고, 내가 사는 모습에 대한 꿈, 어떻게 살 지에 대한 그림이 꿈인데, 호주와 뉴질랜드로의 이민 계획이 틀어진 이후로 나는 그리는 꿈 없이 발 닿는대로 살았다는 걸 깨닫고 나니 당황스러웠다. 내가 꿈이 없다니, 꿈이 없다는 것도 모르고 살았다니!


소피아는 자기 방에 걸어둔 자신의 현재 비전보드를 보여줬다. 자신의 꿈, 여성사업자들과 그들의 사업을 돕고 가이드가 되고 길을 보여주겠다는 꿈 안에 어떤 그림들을 그리는지, 그리는 그림을 연상할 수 있는 사진들을 오려 붙여놓은 가운데에는 올해에는 억대연봉을 이루겠다는 것도 적어놨다.


내가 왜 힘이 안 나는지, 왜 헤매는 것 같은지, 왜 막상 생각한 것을 생각한만큼 실행하지는 않는지, 결국은 내면의 동기부여를 하는 것은 내 꿈이라는 걸 소피아는 알려줬다. 매일 일어나서, 하루를 보내며 순간순간, 또 매일 잠들기 전에 그리는 그림이 있는지, 그 그림이 얼마나 선명한지, 그 그림 속에서 내가 지금 실행을 하지 않고 있는 그 일의 역할이 얼마나 나의 가장 깊은 곳과 연결되어 있는지에 대한 모든 대답이 ‘아니오’였으니 이제 내가 할 일은 차근차근 꿈을 다시 꾸는 것이다.


활화산에서 뿜어져나오는 그 에너지로 나는 다시 내 꿈이 큰 불이 되도록 할 수 있을까.



<챕터 17에서 나누지 않은 이야기들>

Semana Santa 세마나 산타

드럼 서클

멕시코와 과테말라 길거리음식

풀문 서클

그리고 더 많은 워크숍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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