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15. 모든 감정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 의식
내가 스페인으로 간 것은 다름아닌 절친 엠마와 연말, 연초를 같이 보내기 위해서였다. 엠마랑 나는 호주에서 만났다. 2018년부터 내가 꾸준히 듣던 팟캐스트가 있었는데 팟캐스트 호스트가 호주 선샤인코스트에서 한 댄스이벤트 Sacred Dance 에 갔다가 끝날 때 서로 옆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던게 인연이 되어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았다. 코로나 직전에 멜번에서 만나고 이후 코로나 기간동안에는 매달 빠짐없이 두 세시간 영상통화를 하며 시간을 두고 친해졌다. 그러다가 엠마가 호주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유럽에 와보기로 한 것이었는데, 스페인에서 펫시팅을 하기로 해서 호스트에게 양해를 구하고 나도 같이 지내기로 했다.
코로나가 유행인 기간동안 호주는 전세계에서도 가장 엄격하게 국경을 닫았던 곳이었어서 엠마와 나는 근 4년만에 만나는 것이었다. 공항에서 나와 서로를 발견하고 우리는 비명을 질렀다. 오랜만에 만나는 절친들. 이번 해에 파나마와 미국에서 이어 세 번째다. 우리의 호스트 데저레는 은퇴한 네덜란드인 기자였는데, 은퇴 이후에 스페인에 정착해서 강아지 한마리와 고양이 두마리를 데리고 살고 있었다. 맛있는 저녁을 우리에게 대접하고 다음 날 우리에게 어디에서 장을 볼지, 강아지 고양이에게 필요한 것들은 무엇인지, 약은 언제주고 산책은 어디서 주로 하는지 등을 설명하고 직접 보여줬다. 그리고 나서 다음 날 데저레는 휴가를 떠났다.
스페인은 스위스보다는 날씨가 따뜻했지만 나의 겨울 비움, 재정비의 시간은 이어졌다. 우리는 잠을 충분히 잤고, 요리를 해서 나눠먹고, 따뜻한 차나 코코아를 마셨다. 쉼이라기보다는 적극적인 재충전에 가까웠다. 일은 평소보다 덜했다. 연말이라 일이 적기도 했고 관두기로 한 일도 인수인계가 점차 마무리가 되어갔으니까. 바닷가를 천천히 거닐면서 조용히 파도소리를 듣고, 조개껍데기와 돌을 주워와서 마당에 늘어다놓기도 했다. 새 책들도 읽었다. 느릿느릿 흘러가는 하루. 겨울하루. 대화를 하던 도중에 엠마가 겨울의 비움과 재정비에 새로운 의미를 더했다. 죽음과 슬픔, 그리고 그를 기리는 것.
우리는 어떤 감정에는 우리 마음 안에 충분한 자리를 내어주고 즐기지만, 흔히 부정적이라고 일컫는 감정들에게는 그렇지 못하다. 슬픔, 분노, 짜증 등등. 얼른 쫓아내기에만 바쁘다. 하지만 우리는 좋은 것들만을 보고 느끼기 위해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며, 모든 것을 느끼기 위해 있다. 연말에 한 해를 정리함에 있어 내가 이전에는 충분히 자리를 내어주지 못했던 감정들, 특히 슬픔에 그 자리를 내어주고 함께 그를 애도하고 기념하자고 그랬다. 맞네. 나는 지금까지 충분히 내 마음의 그릇을 넓혀 왔고, 그 그릇의 크기는 내 모든 감정을 환영하고 그 자리를 내줄 자리가 있다는 것.
그렇게 스페인에서 엠마가 인도하는 슬픔의 의식Grief Ceremony을 엠마와 나, 그리고 호주에 있어서 온라인으로 참석한 몇 명이 함께 했다. 산책하면서 주운 돌들과 꽃, 나뭇가지들, 죽음을 상징하는 엉겅퀴로 제단을 만들었다. 물을 한 가운데에 그릇 안에 담고 우리는 함께 슬픔을 하나하나 세면서 그 슬픔을 돌에 옮겨 담고, 슬픔이 깃든 돌을 그릇의 물 속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의식을 마친 후에는 물에 담긴 돌을 들고 바다로 가 더 큰 물로, 바다 속으로 흘려보냈다.
엠마는 팔레스타인 제노사이드로 인한 억울한 죽음들을, 나는 여성혐오로 죽고 몸과 마음을, 영혼을 다치는 여성들의 삶을, 한국 여성들을, 아빠와 나, 동생들을 위해 한없이 희생하며 살아서 오직 자신 스스로를 위한 이기적인 선택이 너무나 어려운 엄마의 삶을 슬퍼했다. 슬픔을 함께 느끼고 함께 흘려보냈다.
그렇게 슬픔을 흘려보내고 난 뒤에 몸과 마음이 가벼움을 느낀다. 아직 연약하지만, 회복이 더 필요하지만서도 가볍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같아.
슬픔을 흘려보내면서 나는 나와도 작별인사를 했다. 이번 겨울에 죽은, 이제는 과거로 남을 나. 온전히 나를 나로 있게 하는 것이 아니면 내 삶에 두지 않기로 했으니까. 내 것이 아닌 것에도 자리를 내어주는 삶을 살던 나는 죽었다. 흘려보냈다. 나의 겨울은 이런 의미가 있었네. 이럴려고 내가 겨울을 보내고 싶었던 건가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