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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enet Nov 01. 2020

사랑에 대한 짧은 담화

그 참을 수 없이 유치한 담화들에 대해서

사랑의 행위들은 대부분 상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듯하다. S는 지루해지는 틈새 마다 ‘나를 얼마나 사랑하냐’, ‘나를 왜 사랑하냐’,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냐’와 같은, 묻기조차 민망한 상투적인 질문들로 애인을 괴롭히곤 한다. 언어로 증명할 수 없는 것들을 구태여 증명해달라고 집요하게 애인을 괴롭히는 것은 S의 오래된 습관이자 고약한 즐거움이기도 하다. 단순히 고약한 취향이라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S의 이 ‘질문 놀이’는 S의 결여와 애인의 결여 그리고 알 수 없는 애인의 욕망이 불안이 스크린 뒤에서 펼치는 ‘그림자’ 수수께끼를 맞추어 가는, 사랑이란 관계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결여와 불안을탐색해 나가는 과정을 내재하고 있다.    


최근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한 S의 4살배기 조카는 ‘유치원을 가는 것은 재미 있는 일이지만 엄마가 자신과 헤어지는 일에 슬퍼하지 않고, 그 일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너무도 화가 나는 일’이라고 했다. 유치원에서 실컷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고 온 이 4살배기는 집으로 돌아오는 순간부터 돌연 분노에 가득 차 오후시간 내내 질문들로 엄마를 괴롭히곤 했다. 자신의 온 우주나 다름 없는 엄마와 처음으로 분리되는 경험을 한 아이는 “엄마는 나 없이도 살 수 있어?”, “엄마는내가 없어졌으면 좋겠어?” 와 같은 말도 안되는 질문들로 엄마의 결여를 확인하고자 하고, 아이의 불안을 읽은 엄마는 “그럼, 엄마는 우리  XX 없이는 못 살지”와 같은 아이가 이미 정해둔 답을 반복하며 그 불안의 손을 잡아주는 것이다. S는 엄마를 사랑해서 끊임없이 괴롭히는 이  4살배기의 유치한 투정에서 28살의 자신을 본다.   


의미론적 측면에선 별다른 기능 없는 이 무의미한 담화가 사랑의 담론에서는 생각보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가 흔히들 ‘상투’라 칭하는것들, ‘하늘만큼 땅만큼’ 이나 ‘달을 따다 줄 만큼’과 같은 사랑의 관용구들을 생각해보자. 이 관용구들은 말하는 사람이던 듣는 사람이던 간에 그 유치함에 코웃음 치게 만들지만, 애인의 결여에 임시적인 충만함을 선사하기에 손색 없는 말이라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투로 굳어질 만큼 오랫동안 사용되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렇게 사람을 유치하고, 연약하게 만든다. 이 ‘질문 놀이’를 할 때면 S는 왠지 그들의 관계가운데 벌거벗고 서있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곤 한다.          


너는 나를 왜 사랑해?


- 몰라


그럼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 사랑하니까 모르는 거지


왜?


- 내가 무엇때문에 너를 사랑하면 그 무엇때문에 너를 안 사랑하게 될 거니까.


그는 합리적이지 않은 대답을 합리적으로 설명한다. 자신이 결여 되어있는 만큼 자신도 그를 결여 시키고 있다는 것을 증명 받고 싶었던 S는 이 기가 막힌 증명에 할말을 잃어버리고 만다. S에겐 자신을 억지로 잃어 버려야했던 고통스러운 과정이 그에게는 무언가를 더 채움으로써 완전 해지는 충만의 과정이었나보다. S의 애인은 철학을 싫어하지만 동시에 그는 S가 아는 그 누구보다 철학적이고 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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