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도 더 된 장래희망

드디어, 만화를 그리게 되었다.

by 노미루

두 달전쯤, 도서관에서 진행하는 강좌를 들을 때다.

그맘때 나는 독립출판을 알게 돼서 그에 관한 강의도 듣고, 책도 한 무더기 사는 등 열정에 넘칠 시기였다.

제주도라서 문화생활의 기회도 적고, 강사도 많지 않아 수도권보다 퀄리티 높은 강의를 기대하지 않았는데,

온라인 강의로 진행하다 보니 공간의 제약이 없어서인지 양질의 강의를 많이 접할 수 있었다.


딱 그 시기에 '나에게 제일 잘 맞고 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표현은 뭘까' 고민하고 있었다.

글은 그림일기 시절부터 치면 근 반환갑을 써 왔고 나에게 제일 편한 표현이었지만,

마음속의 '무언가'를 꼭 명확한 글자로 옮겨내야 한다는 것은, 이따금 나를 가두는 기분도 들었다.

분명, 글에 담을 수 없는 그림만이 가지고 있는 표현의 힘이 있고, 그건 절대 글로는 나타낼 수가 없는 건데.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그림을 그리면서 해소를 느끼는 경험을 여러 번 해본 터라, 이 부분에 대해서 생각이 많았다.


마침 도서관 강좌에 웹툰 수업도 있길래 신청했다.

제주에서 강아지와 함께 지내는 일상툰을 그리는 '냇길'작가님과 한 달여에 걸쳐 웹툰을 배우는 수업이었다.

그림과 글이 함께한다면 표현이 좀 더 유연할 수 있겠지, 하는 생각이 절반이었고,

내가 하는 콘텐츠에 따라서 거기에 잘 맞는 표현법이 있을 테니, 그걸 배워보자는 생각이 절반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좋아했지만 그다지 만화책을 즐겨보지 않았고(내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 만화책은 열세 살에 본 도라에몽이다), 뭔가를 그린 지도 오래된지라,

'잘 그려야 해, 그림을 잘 그리는 방법을 배워야 해!'

하는 강박을 가져서 그랬는지, 매 수업마다 스스로 부담을 느꼈다.

누가 나한테 이걸 시킨 적도 없고 작가님조차도 '잘'그릴 필요가 없다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수업을 시작하면 정말 재미있게 그리지만, 또 다음 시간이 되면, '잘' 그려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며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마지막 수업 날...


숙제 검사가 있는 날. 바로, 나의 만화를 그려가는 거였다.

머릿속에 어렴풋이 제주 일상을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만 있었지, 손으로 옮기기까지 엄청난 부담에 짓눌렸던 나.

전날 고찰이랍시고 끄적이긴 했지만 결국엔 아무것도 그려가지 못했다.


마지막 수업이 닥쳐서야 처음으로 심각하게 고민한 흔적.


어차피 숙제도 안 해가는데, 아예 수업을 빠질까도 생각했지만, 그건 작가님이나 스스로에게나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에 꾸역꾸역 온라인 수업에 로그인했다.

열댓 명 정도 되던 수강생들 중 그 날은 단 네 명만 참석했고(사람 마음 다 똑같구나...) 그중에서도 숙제는 단 두 명만이 해온 것이다.

단추 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을 정도로 죄송했다. 작가님에게는 미안하고 나 스스로에게 화가 나서, 다른 사람들이 발표할 동안 어제 끄적인 걸 토대로 휘뚜루마뚜루 그려봤다.


참 희한한 게 또 그리다 보니 술술 그려지는 거다.

그냥 단순히, 부담만 가지지 않으면 심플하게 되는 거였다.


10분 만에 그려낸 우여곡절의 아홉 컷에는 잘 그리고 못 그리고를 떠나서, 스스로 쌓은 부담을 부숴낸 희열 같은 게 있었다.

스스로에게 마감이 있어야만 움직인다고 나불대기만 하고 정작 시작해 본 적조차 없던 나는,

'스스로에게 마감을 주면 되잖아?'라고 바꿔 생각하기로 했고,

오늘이 아니면 더 이상 그리지 않을 것만 같아서, 당장에 sns 계정을 만들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첫 화를 올린 것이다.

휘뚜루마뚜루 그린 첫 화와, 엉겁결에 또 그리게 된 다음 화.


작가님 말이 맞았다.

'잘' 그릴 생각을 하기보다 '완성'을 할 생각을 하라는 말이.


'수업을 들었으면 뭐라도 결과를 내야지.'

'이왕 그릴 거 잘 그리면 더 좋고.'

'못 그릴 거면 내용이라도 좋아야 하고.'

'나는 둘 다 안되잖아?... 애초에 시작을 말자.'

그 누구도 나한테 이런 말 한적도 없는데, 나의 무의식이 이런 흐름으로 방해해왔던 것이다.

애초에 시작하기도 어렵지만, 그걸 꾸준히 해나가는 것도 어렵고, 완성시키는 것은 '잘'그리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거였다. 대단한 능력인 거였다.



나는 참, 어떤 면에서는 완벽주의자 같지도 않은 완벽주의자인데, 내 성에 안 차는 결과물을 내 눈으로 볼 바에는 시작도 않겠다는 주의였다.

그래서 마음속으로만 꿍꿍대고 시작조차 해보지 못한 것들만 10톤 트럭으로 서른 대쯤 된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못해본 것들 뿐만 아니라, 못해본 행동, 시작조차 못해본 관계, 입조차 못 떼 본 말...

이렇게 내 인생 전반에 걸쳐서 미련으로 남았다는 것.


누구보다 미련 많고, 과거를 곱씹는 나로서는 이 아홉 컷이 참 의미 있는 것이다.

허름하고 허접해도 '시작'을 끊었다는 거니까. 완벽함만을 바라던 내가, 허름함을 인정하고 완벽으로 만들어가려는 스타트인 거니까.


그래서 이 별것도 아닌, 내 만족일 뿐인 이 허름한 만화를 계속 연재해 나가다 보면, 나의 미련들도 옅어지고 현재에 충실하게 되려나.

도구일지라도 상관없다. 뭔가를 꾸준히 한다는 것도 능력이라는 말에 드디어 공감을 하게 됐으니까.

그렇게 이십 년도 더 된 장래희망인 '만화가'를 자기만족으로라도 시작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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