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가 아예 아닌 것보다는 나쁜 페미니스트가 되는 편이 훨씬 낫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에서부터, 메갈리아 논쟁과 미투, 낙태죄 폐지 그리고 포스트-미투까지, 한국에서 거의 모든 권리 주장 운동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아니 페미니즘은 특히 더, 어떤 완벽성을 요구받는다. 그 완벽성에 대한 기대는 그것을 응원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그것을 좌절시키기 위한 의도로부터 비롯된다. 세월호 참사 때 박근혜 정부가 진짜 유가족과 가짜 유가족, 선한 유가족과 악한 유가족을 나누려 했듯이,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진짜 페미니즘과 가짜 페미니즘을 구분하려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그것이 나쁜 이유는, 그것이 실제로 어떤 '진짜'를 발견하기 위한 구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을 시도하려는 자들은 자신들의 눈에 보이는 모든 페미니즘을 가짜 페미니즘이라 규정지으면서 진짜 페미니즘은 비가시 영역으로 밀어 넣으려 한다. 아니, 그들 눈에 보이는 모든 페미니즘을 그들은 모두 가짜라고, 나쁘다고 부른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저 부정하고 싶기 때문이다. 눈 앞에 보이는, 자신들을 조금이라도 불편하게 할만한 것들 모두를 부정하기.
인류가 하나의 동일한 종이라는 믿음에 근거한다면, 미국에서도 페미니즘은 우리나라의 요즘과 비슷한 상황을 겪어 왔을 것이며, 지금도 겪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록산 게이가 자신을 '나쁜 페미니스트'라고 명명한 것은, 모든 페미니즘을 나쁜 페미니즘이라며 가시영역에서 지우고자 했던 남성 중심의 기득권과 편견에 저항하고자 함이며, 그러기 위해 페미니즘을, 그리고 여성인 자신을 내보이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그녀가 그녀 자신을 바라봤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페미니즘은 단순하게 여성들이 그들 여성을 여성으로서 인식하고 바라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일 것이다. 페미니스트Féministe라는 단어를 거칠게 해석하자면 그것은 '여성(적)이고자 하는 인간', '여성임을, 혹은 여성성을 긍정하고자 하는 인간'이 될 테니까. 그리고 인간이 여성으로서 태어난다는 것이 무조건 반길만한 일은 아니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일 것이다. 그러니까 그러한 사실을 인식한 이상, 그들은 무엇이든 행동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추정할 수 있었던 록산 게이의 목적, 여성을 가시화하기라는 것과 관련하여, 저자는 여성이, 그리고 그녀 자신의 정체성이기도 한 흑인이, 대중매체 속에서 거의 가시화되지 않고 있거나 잘못, 혹은 제한된 모습으로만 가시화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녀는 스스로 유행 음악을 듣기를 좋아하고, 영화와 방송 등 영상 매체를 즐기기에, 자신이 보고 들은 것들에 대해 언급하며 다양한 현상에 대한 해석을 덧붙인다. 그러면서도 여성 혐오적 표현이 다분한 어떤 노래에 대해서 자신도 모르게 그 노래를 흥얼거리며 리듬을 타는 것을 고백하며 자신의 모순됨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그러한 것까지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한 태도는 무분별하게 왜곡된 시선이 가득한 대중매체를 피할 수 없었던, 보지 않을 수 없었던 우리에게 패배주의적 감정을 강요하기보다는 오히려 우리를 위로해준다. 그러면서 저자는 우리가 대중매체 혹은 대중매체 속 연예인들에게 의지하는 대신 작은 것에서부터라도 싸워야 한다고 호소하기도 한다.
계속해서, 록산 게이는 페미니스트가 되기 위한 자격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거부하며 그보다는 차라리 우리가 우리 앞에 있는 부정injustice 가득한 현실에 맞서 침묵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원리에 대해 설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젠더 정체성, 혹은 젠더에 대한 입장 모두는 가변적이며 불안정한 것일 뿐만 아니라 외부 공간에서 제도화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들 모두가 애초에 개인 혼자만의 의지와 책임에 따라서만 결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들이 우리의 '수행performance'이라는 말은, 그리고 그것들이 가변적이라는 말은, 외부공간에 대항하여 혹은 외부공간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행동 양식을 바꿔나가느냐에 따라 우리의 정체성과 외부공간까지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말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만큼은, 저자는 어떤 조건을 전제한다.
하지만 이러한 전제 조건 또한,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재-인식하는 또 하나의 '수행'일뿐이며, 따라서 그것은 우리의 젠더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에 포함되고 마는 것이다.
한국의 페미니즘이 본격적으로 대량 발화하기 시작하자마자 지금처럼 격한 저항을 맞이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 개개인부터가 자신의 특권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자신의 특권을 인정하기보다는 어떤 권리를 요구하는 이들에 맞서 그들에게 그들보다 내가 더 불쌍하니, 혹은 그들보다 다른 이들이 더 불쌍하니 목소리를 내지 말라는 말만 하고 있는 형편이지 않은가. 자신이 누리고 있는 특권을 갖지 못한 이들의 목소리도 들으면서 또한 자신이 갖지 못하고 있는 특권을 누리고 있는 이들도 또 다른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는 없을까? 왜냐하면, 단순히 그렇게 하는 것이 민주주의 국가의 본모습이기 때문임을 넘어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뿐일 것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한국은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금기어로 만들고자 하는 것일까?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한국은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금기어로 만들고자 하는 것일까?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한국은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금기어로 만들고자 하는 것일까? 아, 불쌍한 페미니즘이여.
저자는 책 막바지에서 '진짜' 페미니즘과 '가짜' 페미니즘을 가르려는 움직임이 페미니즘 내부에서 또한 있어왔음을 시인하며, 소위 근본주의 페미니즘에 스스로 속아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인정하지 못했던 이야기도 고백한다. 그러니까 문제는 근본주의 페미니즘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다양한 모습의 페미니즘이 있을 것임을, 있어야만 함을 인정하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고자 하는 행태이다. 대중매체가 여성을 다양한 모습으로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봐야 하는 것처럼 페미니즘 또한 스스로를 다양한 모습과 시선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내가 근본주의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로 겁먹지 않아야 되는 것이며, 아니면 내가 근본주의 페미니스트가 아니라는 이유로 페미니즘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며, 결국 서로를 '관찰'하고 '인정'할 수 있는 대화와 토론이 가능한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 스스로가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을 줄 알아야 한다.
록산 게이는 그렇기 때문에 이런 문장으로 책을 끝내고 만다. 그녀의 믿음을 가슴속에 새겨둘 필요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