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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형식 Aug 30. 2018

대기실 #3

 영화를 한다는 것은 나에게 대부분 포기와 실패의 반복이었다. 영화 만들기를 위한 글을 쓰거나 생각을 이어가다가 그것을 완성한 후 혹은 그 도중에 나는 포기와 실패를 반복해왔다. 영화를 해온 10여 년 간, 진정 영화를 한 시간보다는 영화를 포기하거나 실패한 시간이 더 많았다고 볼 수 있겠다. 영화를 위해 나의 생각을 끄집어낸다는 것, 영화라는 평면 이미지를 가정하며 글로 써본다는 것, 그것은 바로 그 '나의 생각'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것들이 일단 끄집어내어져 내 눈 앞에 있게 되면, 도대체가 이런 이야기 혹은 이런 이미지들이 어떤 가치가 있길래 영화로 만들어져야 하는지에 대해 내가 도저히 납득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중요하다고, 표현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결국에는 그런 아이디어들의 원천인 내가 트럭이 밟고 지나간 맥주캔처럼 아주 납작해진다.

 돌이켜보면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들을 해온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의 삶 속에서, 이념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그리고 영화적으로 힘들게 고민하지 않고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것들을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된다. 나의 정치적 이념을 위한 영화는커녕 정치적 이념을 표현하는 영화조차 나는 만들고자 하는 관심이 없었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굉장히 힘든 일로 남아있다. 특별히 정치와 예술을 분리하려 하지 않아도, 어떤 예술을 만들어내고자 할 때 정치성이 외면당하는 것은 관성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바로 그 정치적 목적의 부재가 모든 그 포기되어왔던 영화들, 그리고 포기되었어야 했을지도 모를 영화들의 근원이었다고 믿는다. 고다르가 내세운, 정치적인 영화가 아니라 '정치-영화'와도 같은 자세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내가 정치적 목적성에 등을 돌린 사이 몰두했었던 영화적 원리, 개인적인 영화적 목적성이 완전히 가치 없었다고 볼 수는 없겠다. 아주 헛되보이면서도 힘없고 작은 발걸음으로 멀리 돌아온 방법이었을지 몰라도, 그것은 결과적으로는 나의 '정치-영화'를 위한 단단한 토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번번이 포기해온 나의 영화적 운동은 영화 속 캐릭터가 하게 될 가장 중요하고 주된 운동 중 하나가 되어왔다. 캐릭터들이 어떤 선택을 하게 될 때에는 주로 다른 어떤 것을 포기하게 됨으로써 가능했다. <그리고 영화는 계속된다>에서 배우를 꿈꾸는 주인공은, 죽은 엄마의 시체를 닦는 염실에서 엄마의 장례를 끝까지 함께 하는 것을 포기하고 약속되어 있었던 단편 영화 촬영장으로 향하면서 영화를 끝낸다. <수화교실>에서는 여자 주인공이 수화교실을 다음 주부터 나오지 못한다고 알리지만, 그에게 관심 있었던 남자 주인공이 자신의 마음을 적극적으로 어필하는 것을 포기함으로써 사랑 고백이 아니라 야구 배팅장에서의 배트 스윙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달을 올려다보기라는 전혀 다른 움직임으로 영화를 끝낼 수 있게 된다. 그 밖에도, <이름 없는 여행>에서는 배우였던 주인공이 연극을 포기한 상태에서부터 영화가 시작된다. 그 이후부터 나는 모든 영화를 어떤 것을 포기하거나 실패함으로써 시작하려는 마음을 먹기 시작했다.

 영화적 원리에 대한 개인적 탐구는 영화 만들기를 영화에 대한 생각하기와 탐구하기, 아니 차라리 영화로 생각하기로서 여겨야 한다는 신념으로 굳어졌고, 그것은 거의 모든 영화적 요소-시간, 시선, 장소의 점유, 움직임, 감정 등-를 그야말로 함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배우'라는 사람, '연기'하는 사람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연기하는 사람을 나의 영화에 등장시키게 되었다. 배우란 보는 사람임과 동시에 자기 자신을 스스로 볼 때에는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고, 그러한 고민은 영화 속에서 내가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보여주지 않을 지에 대한 고민으로, 그리고 무엇을 바로 '내가' 보고자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배우가 어디에 위치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과 함께, 카메라가 어디에 위치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나올 수밖에 없었고, 나는 배우들 혹은 사물들의 위치들 중, 그것들이 점유하고 있는 위치를 제외한, 그것들이 점유했었던 위치 혹은 점유할 위치들 중 어느 한 곳에만 카메라가 위치할 수 있다는 가정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것은 일종의 제한이었지만, 대부분은 카메라 위치를 정하는 데 있어서의 간편함을 제공하는 원리이기도 했고, 그 위치를 찾지 못할 때에는 오히려 배우들 혹은 사물들의 위치 이동, 즉 움직임을 유발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었다. 


 위에서 나름 정립된 것처럼 보이는 어떤 원칙들에 대해서는 추후에 그 배경과 쓰임새 혹은 그것의 철회를 더 충실히 설명할 수 있게 되겠지만, 그렇다고 이제껏 포기되고 실패된 영화들이 그러한 원칙들의 기념비적인 작품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전혀 아니라고 말해야만 하겠다. 그것들은 그저 조잡하고 실패한, 어긋난 작은 실험들이었을 뿐이었다. 이야기들은 개연성에서 힘을 얻고자 하기보다는 그저 배치되는데 충실하기 일수였으며 따라서 그것들은 그저 일련의 이미지들의 몽타주 실험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결국에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들로 아주 쓸모없고 납작해진 이미지들이 되었고, 우연히도 나는 거기서 이미지의 평면성이 아니라, 이미지'들'의 평면성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이미지의 2차원적 평면성의 의미가 아니라, 이미지들이 나열됐을 때의 서로에 대한 은유적 동일성으로의 평면성이었다. 그 아이디어로부터 2016년에 <나무>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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