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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형식 Aug 09. 2018

대기실 #2

 오늘은 시간이 느리게 간다. 시간이 간다, 혹은 흐른다, 라는 것은 생각해보면 어색한 문장이다. 왜냐하면 동어반복적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애초에 동사적이다. 그런 것이 아니라 일부러 영원성이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하여 시간이라는 명사를 사용하고 싶다면, 그 명사에 대한 가능한 동사는 '있다' 혹은 '없다' 뿐이다. 시간은 가지 않는다. 우리가 시공간을 주파하거나, 아니면 그저 수집할 뿐이다. 여타의 확률들을 상쇄시키면서 그리고 가능한 모든 확률들을 더해가고, 우리 자신의 그 변화의 속도를 우리는 차라리 시간이라고 부른다. 움직임의 신비를 우리는 시간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으로 또 설명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과 관련해서, 영화는 거꾸로 한다. 영화는 일단 시간을 간단히 만들어냈다. 1초에 24장의 사진을 차례대로 쏘면서 선형적 시간을 만들어낸다. 환영이 우리를 움직임의 신비에 감탄하도록 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잠깐이고, 사실은 우리는 그 신비를 기술이라는 이름으로 간단하게 제거한다. 대신에, 이제 우리의 눈 앞에는 움직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장면이 있게 된다.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자꾸만 기억하게끔 하는 것이 장면이라는 이미지이다. 언제든지 기억해내어 불러올 수 있는 이미지가 생김으로써 여기서, 영화는 영원성을 획득한다. 그것은 정지라는 의미로의 영원성이 아니고, 반복으로서의 영원성이고, 회귀로서의 영원성이다. 영화는 시간에 대한 우리의 두 관념, 영원성과 움직임을 서로 곱함으로써 시간의 존재를 증명해낸다.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들에서 비슷한 사이즈로 앵글에 잡힌 인물들의 그 모든 웃음, 그들의 부채질, 더위, 아무도 없는 계단, 그들 각자가 기다리는 시간, 서로에 대한 각자의 섭섭함들이 영원히 반복되는 것 같다. 차이밍량의 인물들은 유령처럼 영원히 서로를 스치며 배회하고, 그들은 영원히 증발하는, 내리쬐는 햇빛 속에서든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든 무한히 위로 증발하기만 하는 존재들이다. 데이비드 린치의 인물들은 조금 더 길고 고된 여정을 거쳐서 결국 자신의 모습을 대기실 같은 공간에서 지켜보는 내러티브를 영원히 반복하게 되는 것 같다. 샹탈 아커만이 스스로를 반복시키는 방법은 시간을 느리게 가도록 하는 것이다. 방이라는 공간을 갈구하는 동시에 벗어나려고 하면서 자신과 자신의 주변에 대하여 말하며 자신의 원초에 회귀하려 하는 불가능하고 모순되는 내레이션이 영원히 이어진다. 미조구치 켄지의 여성 주인공들은 끊임없이 여지를 찾아 떠나지만 끊임없이 실패한다.

 모두 처음과 끝이 있는 영화와 삶의 내재적 선형성을 극복하려는 시도들로 보인다. 시간의 처음과 끝에 죽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사이사이에 죽음이 있다. 이런 영화들은 자신의 원리 혹은 미스터리에 자신의 시선을 던진다. 자신의 한계에 자신을 던진다.


 영원x움직임=시간을 속도라는 단어로 대체하고자 한다. 영화는 시간을 만들어내는 거창하고 획기적인 기계장치에 그치지 않고, 자신만의 속도를 가진 감상sentiment을 반복시킬 줄 안다. 그리고 그 속도에는 방향, 즉 의미sens가 있기 마련이다. 방향성이 제거될 때 영원성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방향성이 감춰질 때, 보호될 때 영원성이 생긴다. 우리가 하나의 방향으로 하나의 입을 가지는 것처럼, 영화도 자신의 입을 가지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즉, 영화는 '말하기'라는 운명에 놓인다. 무엇을 어떻게 말할지에 대한 고민 없이 영화가 자기 자신에게 회귀하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또 영화가 그가 말하고자 하는 인물들, 역사들, 현상들 등 모든 대상에 그들만의 속도를 부여하지 않고 그것들에 대해 말하는 것 또한 불가능해 보인다. 우리는 그 영화적 시간, 속도를 '이야기'라고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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