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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형식 Sep 04. 2018

대기실 #4

 장 폴 사르트르의 <구토>를 읽으면서, 글쓰기의 필요성을 느꼈다. 나도 글을 써야만 살 수 있다고 느꼈다. 그렇다고 그 책을 다 읽자마자 그런 다짐을 바로 또 꾸준히 실행에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중요한 건 그 이후부터 내가 글을 쓸 때마다 내가 글을 쓰고 있음을 자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좀처럼 '삶'이라는 업보에 적응하기에 지칠 때마다 글쓰기라는 과정의 힘을 빌리고는 했다는 것이다. 글을 써야만 살 수 있다고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글을 쓸 수 없는 것은 아마도 매일 삶을 살아가기란 나에게 힘든 일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삶을 매일 사는 것은 나에게 역부족일 뿐만 아니라, 굳이 그러고 싶지도, 그래야 할 필요도 없는 일일 지도 모른다.


 사르트르는 <말>에서 자신의 침묵의 배경을 알기 위해서 글을 쓴다고 말했다. 아니, 그러기 위해서 말을 한다고 말했던가? 어쨌든 그 말은 나에게 내가 진정 침묵할 수 있기 위해서는 말을 해야 한다는, 말한다는 것을 탐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렇지만 그 생각의 의미가 말과 침묵을, 그리고 이 둘과 비슷한 관계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의미와 무의미를, 긍정과 부정을, 움직임과 정지를 이분법적으로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었음을 진정으로 깨닫는 것은 나에게 오래 걸리는 일이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사뮈엘 베케트는 나에게 만연체를 가르친 작가였다. 그는 말하기와 말하지 않기를 같이 하려고 하는 작가였으며, 보기와 보지 않기를 같이 하고 싶어 했다. 아니, 사실상 말하기와 보지 않기를, 말하지 않기와 그저 보기를 같이 하고 싶어 했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는 와중에 그의 글은 길게 이어지고 있었으며 그 글은 어떤 궤적을 그리기 마련이었다. 그의 작품에서는 말하는 것도 말하지 않는 것도 그 어떤 것도 죄악이 아니었거나 아니면 차라리 그 모든 것이 고난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그 고난의 시간을 최대한 늦게 끝내기 위해 글을 쓰는 것 같기도 했다. 그의 단편 <첫사랑>은 이런 문장으로 끝난다. "사실 소리가 약하고 강한 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중요한 건, 그 소리가 멈추는 것이다. 여러 해 동안 나는 그 소리가 그칠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은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나한테는 다른 종류의 사랑들이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랑, 그것은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의 또 다른 단편 <끝>은 이런 문장으로 끝난다. "바다, 하늘, 산, 여러 섬들이, 심장이 한번 크게 팍 수축하자 나를 박살 내려고 쭈욱 다가왔다가, 저 끝으로 물러났다. 나는 내가 할 뻔했던 이야기, 말하자면 끝낼 용기도 그렇다고 계속할 힘도 없었으면서 할 뻔했던, 내 삶을 본뜬 그 이야기를, 섭섭함도 없이 어렴풋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모리스 메를로-퐁티가 <간접적인 언어와 침묵의 목소리>에서 말한 대로, "말한다는 것은 개개의 사유에 단어를 붙이는 것이 아니"었다. "언어는 사물 자체를 표현하기를 포기할 때 비로소 진정한 발화로 자리매김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반드시 말을 해야만 한다면, 거기에는 대상을 정확하게 표현하거나 정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혹은 그것에의 기대를 배반해야만 가능한 더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 "언어란 단지 하나의 의미를 다른 의미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등가적인 의미를 치환하는 것이다. 새로운 구조는 이미 과거의 구조 속에 현존했던 것이며, 과거의 구조가 현재의 구조 속에 여전히 생존하고 있기 때문에 과거를 지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구조라는 단어를 시간이라는 단어로 바꿔 말하고 싶다. 내가 어제의 일에 대해서 말할 때, 그것은 어제의 일을 묘사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차라리 어제라는 시간에서 지금의 시간을 바라보기 위해서일 것이다. 말한다는 것 또한 바라보기 위한 것이었다. 저 대상이 있는 시간과 공간으로 가서 나를 바라보기.


 트린 티 민하는 "몸은 개인과 사회가 만나는 지점"이라면서, "글쓰기란 (생각하기도 마찬가지로) 글쓴이의 몸에 대해, 그리고 몸에게 말하는 매우 신체적인 과정이다"라고 말했다. 다시 퐁티를 인용하면, "몸은 모든 것을 일례로 만들거나 아무것도 만들지 못하며, 우리 자신인 동시에 우리 자신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목적도 수단도 아니며, 언제나 자신이 극복할 수 없는 사건들과 얽혀 있고, 늘 자신의 자율성을 열망한다. 또 그것은 협의된 것에 불과한 모든 목적에 반대할 정도로 충분히 강력하나, 마침내 우리가 그것과 상의를 하려고 하면 그 어떤 것도 제시해주지 못한다. 우리는 이따금 자아를 강하게 느끼게 되는데, 이때 몸은 자신에게 생기를 불어 넣고, 전적으로 몸이 아닌 삶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게 된다." 아마도 언어와 의미 사이에는 단순히 "종속 관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침묵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차라리 진정 침묵하기 위해서는, 언어와 의미 사이의 종속 관계를 모조리 타파하고 그것들의 높낮이 차이를 없애 평평하게 만들기 위해서 말해야만 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말하는 것과 바라보는 것을 혼동해야 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말이 의미에게 잠식당할 것 같으면 우리는 그저 눈을 뜨고 바라봐야만 할 것이고, 침묵의 자취가 사라질 것 같으면 그때는 입을 열어야 할 것이다. 말하다와 보다, 그리고 저 둘이 어떤 움직임을 생성시킨다면 그 둘 사이에 언제나 삽입 가능할 단어인 가다와 오다는 서로에게 언제나 모호하게 (비)의미되어야 한다. 앞서 열거했던 이분법들 또한, 그것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 단어들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단어들에게 언제 어디서나 쓰일 수 있는 자유를 줘야만 한다. 어쨌거나 우리는 말하기라는 고난을 회피할 수 없다. 그 고난은 우리 몸에 대한 고난이며, 우리의 몸은 나라는 개인과 타자라는 사회가 만나는 지점이다. 나의 몸이 아닌 다른 삶이 있다. 우리는 말할 때마다 그 다른 삶에서 우리를 바라보지만, 항상 똑같은 위치에서만 바라보고 항상 똑같은 것에 대해서만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똑같은 것을 언제까지나 바라보거나 말하는 것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말하는 것과 바라보는 것을 혼동하듯 그 주체와 대상을 혼동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기와 바라보기라는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르는 동시적 행위는 주체와 대상 모두를 바꿔가는 궤적을 그리며 운동한다. 그래서 말하기의 문제는 이런 질문들에까지 (다시)오게 된다. 어떻게 가장 먼 궤적을 그리는 글을 던질 수 있을까. 어떻게 가장 멀리서 나를 바라볼 수 있을까. 어떻게 가장 멀리서 나에게로 돌아올 수 있을까. 어떻게 무엇을 말하고서, 저기서 나를 바라보고, 여기로 (다시)돌아올 수 있을까. 나는 어떻게 침묵할 수 있을까. 나는 어떻게 침묵의 궤적을 그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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