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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형식 Sep 13. 2018

대기실 #5

 영화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쯤, 데이빗 린치의 영화를 봤을 때, 나는 이 감독을 좋아해야만 한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그의 영화는 정확히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했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이미지들이 날 압도했다. 영화란 적어도 이 정도로는 난해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것이 내가 그의 영화를 좋아한 지점이었다. 거기엔 내가 볼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그만의 세계에 몰입될 수 있었음에도, 수수께끼는 풀리거나 해설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 것임을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삶은 미스터리였고 삶에 속하는 모든 이분법적 수수께끼, 즉 선과 악, 사랑과 증오, 호기심과 공포, 쾌락과 고통, 탄생과 죽음, 기쁨과 슬픔, 현실과 꿈, 진실과 거짓, 이 모든 것들은 서로를 전복시키거나 서로가 도치되는 것을 넘어서 자신의 짝 말고 다른 이분법들의 영역까지 침범하며 상대를 바꾸는, 일종의 '불륜'을 저지름으로써 이 세상을 가능케 한다. 이 세상은 그 덕에 가능하면서도 또한 그 자신 때문에 그것들을 가능하게 하는데, 이 세상 자체 또한 무대적 시공간과 대기실적 시공간으로 애매하게 구분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그 둘로 필연적으로 구분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둘을 영화적 시선으로 (재)연결하기 위함일 뿐이었으며, 결국 린치의 영화들은 어떤 감정이라는 무대에서 그 감정을 겪는, 혹은 실행하는, 혹은 연기해내는, 혹은 연기당하는, 그 감정이라는 무대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기 위한 영화였다. 그의 영화는 관객이 보는 영화가 아니라 그 영화의 주인공 그 자신이 보는 영화였다. 그렇기에 거기에는 알 수 없는 것들이 가득해야만 했다. 그 모든 알 수 없는 감정들과 알 수 없는 세계들을 모두 감당해낼 수밖에 없는 그 자신을 마주하는 영화가 린치의 영화다. 알 수 없음의 심연은 바로 그 시선에 기인한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 아니면, 이상한 말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불가항력적인 감정 이입일지도 모른다. 어떨 때 그것은 끔찍하게 공포스럽지만 어떨 때 그것은 이상하리만치 감동적이다.


 <동경 이야기>로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나는 영화라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 본질적으로 '본다'라는 것에 대한 예술임을 진정 배울 수 있었다. 오즈의 영화는 매 순간 끝없이 본다는 것에 대한 사유를 하게 한다. 본다는 것이란 무엇인가? 필연적으로 주체와 거리를 두고 있는, 대상에 대해 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 그리고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알 수 없음, 이러한 무능이 시선이라는 것에 내재되어 있다. 오즈는 마치, 본다는 것이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과 다름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바로 오즈 영화의 그러한 태도가 보는 이로 하여금 본다는 것에 대해 사유하게 만드는 것이다.

 오즈의 영화가 어떤 것을 성취해내는 과정과 스펙터클의 영화가 아닌 것은 오즈가 삶과 영화를 그러한 것으로 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대신에 오즈의 영화에는 언제나 섭섭함만이 남는다. 섭섭함이라는 단어의 뜻이 도대체 무엇인가? 영어를 비롯한 서구 언어에서는 그와 비슷한 단어조차 찾을 수 없는 이 단어를, 우리는 상대에 대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사용한다. 섭섭함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섭섭함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것이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는 어쩌면 그것이 애초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결혼하는 딸에 대해 홀아버지 혹은 홀어머니가 갖는, 부모님 모시기와 관련하여 형제들이 서로에게 갖는, 생각보다 여유롭게 살지 못하는 도쿄에 상경한 아들에게 홀어머니가 갖는 섭섭함. 오즈의 영화 속 인물들의 삶에 언제나 이러한 섭섭함이 남는 것은 오즈가 삶을 그 자신의 영화적 태도로 대하고 있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반대로 그 자신의 영화적 태도를 삶의 잔여물에서 찾기 때문일 것이다. 본다는 것은 섭섭해하는 것인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본다는 것인 것이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이러한 본다는 것의 주제를 더욱 직접적으로 다루려고 했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다음에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와 <올리브 나무 사이로>로 연결되는 과정은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영화를 통해 현실을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즉 영화적 진실cinéma vérité에 대한 증언에 다름 아니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를 찍은 영화감독이라는 그 자신의 상황을 캐릭터로 직접 등장시키는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그리고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를 찍고 있는 영화감독이라는 그 자신의 상황을 또다시 캐릭터로 직접 등장시키는 <올리브 나무 사이로> 모두 그 캐릭터 자신의 목적을 위한 여정을 지연시키면서 아예 그 영화 자체를 끝나지 않을 것처럼 만든다. 따라서 이 캐릭터 혹은 이 영화가 애초에 보려고 했던 것 대신에, 우리는 그 여정 속에서 그저 실제 일어났었던 지진의 피해 속에서 회복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만나거나, 영화를 찍는 과정 속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여성에게 구혼을 하려 하는 어떤 청년의 이야기에 눈길을 돌리게 된다. 따라서 자칫 영화가 길을 잃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사실은 영화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일어난 과거가 된 대지진의 재앙 앞에서 그 피해자들에겐 우리는 외부인일 수밖에 없고 그 재난 지역을 지나가는 것조차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에 대한 한계를 그저 드러내는 것이라는 것이고, 이미 완성이 된 영화를 다시 찍으면서 가난하고 별 볼일 없는 청년의 구애의 마음을 담으며 영화가 현실 속에서의 진짜 사랑을 이루어줄 수 없으며 대신 그것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받아들이려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영화는 뭔가를 해내거나 이룰 수 없고, 그저 볼 수만 있다는 것이다. 아니, 영화는 볼 수 있기 때문에 바로 그 대상이라는 현실을 담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다른 영화들에서도 계속해서 관객, 즉 보는 이의 영화에 대한 기대를 의도적으로 배신함으로써 무엇을 볼 수 있고 무엇을 보려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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