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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형식 Sep 18. 2018

대기실 #6

 글을 쓸 때의 '나'라는 것이 언제나 '그 글을 쓰고 있는 나'이듯, 영화를 만들 때의 카메라는 언제나 '그 풍경을 찍고 있는 카메라'일 것이다. 카메라는 실존적이어야 한다고 말하기보다는, 카메라는 실존적이기만 해도 충분하다고 말하고 싶다. 카메라는 그 자신을 숨길 필요가 전혀 없다. 이 말은 화면 속 유리나 거울 어딘가에 카메라의 모습이 반드시 비쳐야 된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영화가 그 자신이 카메라 촬영에 의해 만들어진 영화임을 숨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애초에 그것은 숨길 수가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실존성은 카메라에만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영화에는 그 화면을 담는 카메라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카메라를 설치하는 사람도 있었음에 틀림없고 그 화면에 나오는 배우들은 그저 어떤 캐릭터의 형상, 이미지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영화와 그러한 연기에 동의하고 그것을 실행한 어떤 실존적 사람이었을 것이다. 즉, 그 영화를 위한 모든 요소들이 어떤 시간과 공간을 점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영화 영사의 환영성은 어쩌면 2시간 정도의 현실도피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저 "카메라와 배우가 그때 거기에 있었음"을 "카메라와 배우가 그때 거기에 '지금 있음'"으로 시제만 바꾸기 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말해 영화 보기는 '지금, 여기'를 그 영화의 시공간에 내어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카메라가 동시간의 어떤 인물과 사물, 즉 그 자신의 대상의 공간을 중복 점유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중복 점유할 필요가 없다고 말이다. 카메라는 그 자신의 대상이 자리를 비켜준 공간만을 점유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혹은 그 자신의 시선이 닿았었거나 닿을 예정인 공간만을 말이다. 이러한 원칙은, 아니 사실은 이런 원칙에 이르기까지의 카메라에 대한 고민은 카메라가 대상을 어떻게 볼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을, 그리고 같은 의미이기는 하지만 대상이 어떻게 움직일지를 상상하는 것을 도와준다. 그리고 이런 원칙은 영화 내에서 바로 그 시점에 그 컷의 앵글이 어때야 되는지에 대한 해답 불가능한 고민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켜주기도 한다.


 그리고 '영화 만드는 나'를 항상 카메라와 있게 한다. 카메라와 있기 시작할 때, 카메라와 함께 보는 것에 대한 고민을 할 때, 영화(만들기)는 다시 시작한다. 카메라와의 경험은 본다라는 행위의 의미를 변화시키고 확장시킨다. 혹은 축소시키거나. 그건 눈으로 보는 것을 렌즈로 보는 것으로 대체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누군가가 여기서 보지 못하는 것을 영화관이나 방에서 볼 수 있도록 잠시 저장해두는 것도 아니며, 어떤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해내는 것도 아니다. 카메라는 본다라는 의미를 생각한다 혹은 살아간다의 의미로 이끈다. 다시 말해,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도록 나를 이끈다.


 카메라는 그 자신을 관객과 동일시하지도 않고 그 자신을 혹은 관객을 대상과 동화시키지도 않는다. 카메라는 그저 시공간을 스스로 점유한다. 카메라는 대상과 거리를 둔다. 카메라는 이미지의 창조주도 아니다. 그리고 그 자신 없이 가능한 이미지들(자막 화면 혹은 애니메이션)과 무관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카메라는 단순히 렌즈와 이미지센서, 저장장치, 삼각대 등에 그치지 않고 어떤 영화 이데올로기이다. 우리는 카메라의 존재 위에서 사유하고 또 그 안에서 사유한다. 카메라는 매개물이라기보다는 대화 상대이며, 그런 의미에서는 차라리 눈이라기보다는 입이어야 한다. 카메라는 무엇보다 '영화 만드는 나'와 대화를 하며, 그 자신의 대상들을 그대로 운반하는 것이 아니라 번역한다. 카메라는 관객과 대상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화 만드는 나'의 옆에, 그리고 관객 혹은 관객으로서의 나와 같은 방향으로 위치해있으며, 그리고 대상의 과거 혹은 미래에 있다. 카메라가 영화 영사의 환영이 그저 환영일 뿐 그것 자체는 아무 의미도 갖지 않아도 되도록 할 때, 카메라 자신은 그 자신의 시간을 가지며 관객에게 말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때, 관객은 환영에 몰입되기보다는 스크린 위에서 그리고 그 안에서 사유할 수 있다. 영화는 마술이 아니고, 대신에 어떤 것에 대해서든 다시 이야기할 수 있는 대화 상대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카메라는 그저 어떤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해 사용되는데 그치기보다는 스스로 무엇을 보려고 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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