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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형식 Sep 27. 2018

대기실 #7

 10여 년 동안 "나는 영화를 한다"라고 말한다는 것. 10여 년 동안 영화에 대한 고민을 한다는 것. 10여 년 동안 영화를 본다는 것. 10여 년 동안 영화로 본다는 것. 10여 년 동안 영화로 생각한다는 것. 영화로 생각한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영화-명상을 한다는 것. 좋아하는 감독을 늘려나가는 것. 좋아하는 감독을 더 이상 늘리지 않는 것. 좋아하는 감독을 바꿔나가는 것. 좋아하는 감독을 계속 좋아하는 것. 그 영화 자체나 그 영화의 감독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영화들이 생각하는 방식을 좋아하는 것. 그 영화들을 잊고서 다시 보는 것. 그 영화들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 영화를 다시 볼 수 있다는 것. 극장에서 본 영화들보다 방에서 혼자 본 영화가 더 많다는 것. 어떤 영화를 좋아하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고민하는 것. 좋아하는 감독이 겹치는 사람을 만났을 때 반가움과 동시에 경계심이 드는 것. 서로 미묘하게 다른 이유로 좋아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 어떤 감독의 영화적 태도는 심지어 내 삶의 종교적 수준으로까지 여기는 것. 그러다가 그러한 태도를 배우고 익히는데 소홀해져 죄책감까지도 느끼는 것. 어쨌거나 그렇게 좋아하는 영화들에 의해 내 영화 만들기의 동력을 얻는다는 것. 10여 년 중 처음 절반 정도의 시간을 그렇게 보낸 것에 대해서 아쉬워하는 것. 그럼에도 그 시기를 긍정하기 위해 다시 생각해보는 것. 그 시기에 만들어봤던 영화들에 스스로 실패의 명찰을 붙이는 것. 영화를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 영화를 매번 새롭게 시작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 또다시 실패한 뒤 그동안 있었던 작은 성과에 내가 안주하지 않았나 반성하는 것. 끝없이 어려운 고민에 봉착하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하는 것. 나만의 심연에 너무나 깊게 빠진 것 같다고 느끼는 것. 그것을 다뤄야만 한다는 것.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 극복이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하는 것. 자유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하는 것. 집중할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 10여 년 동안 아르바이트를 전전한다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 벌이가 그나마 나은 영상 연출 및 녹음 스테프 일을 열악한 노동 환경을 핑계로 하지 않는 것. 완성이 될지 확신할 수 없는 어떤 영화들을 생각하는 것에 몇 시간 며칠 몇 달 몇 년을 할애한다는 것. 또는 그저 영화에 대해 생각함으로써 삶과 현실과 시간과 철학적 사회정치적 그리고 예술적 문제 그 모든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 그것이 습관이 된다는 것.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뜨문뜨문 하거나 혹은 단시간 아르바이트만을 하는 것. 따라서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하다는 것. 많은 것을 포기해 온다는 것. 그렇게 포기해 온 것들이 결핍이 되는 것을 안다는 것. 쓸모없는 삶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 그것을 상관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 내가 사랑하고 나로 하여금 영화를 사랑하게 만든 영화들 덕분이라는 것.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아직도 영화 그거 하니?"라는 질문을 받는다는 것. 나이를 물어본 뒤 내 미래를 대신 걱정받는다는 것. 굳이 결혼하지 않을 거라는 둥 가난하게 살아도 상관없다는 둥의 말은 꺼내지 않는다는 것. 부모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 그들의 그런 섭섭함들을 감내하는 것. 현실에 대해 훈계를 받는다는 것. 내 현실을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는 상대가 몇 없다는 것. 현실이라는 단어를 그들과 나는 굉장히 다른 의미로 자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안다는 것. 영화라는 단어에 대해서도 그러하다는 것을 새삼스레 안다는 것. 내 영화를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는 상대가 몇 없다는 것. 내 영화를 보여주기가 물리적으로도 실제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영화를 상영할 기회가 거의 없다는 이유 때문에도 내 영화가 그저 부족하다는 이유 때문에도 가볍게 보이기 싫다는 이유 때문에도 힘들다는 것. 실제로 나는 그들처럼 살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 실제로 나의 영화가 그들의 영화와 닮지 않기를 바라는 만큼. 실제로 서로의 삶이 서로에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는 것. 서로의 영화가 서로에게 불가능한 만큼. 그럼에도 영화가 그들의 삶과 나의 삶을 그리고 그 모든 다양한 삶들을 평평하게 동등하게 사유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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